2018.12.06 11:33

 

<Chinese Typewriter>라는 책 얘기 요 전날 했지. 너무 재밌어서 다른 일 제쳐놓고 통독했네. 내용에 잔재미도 있지만, 오랫동안 궁리해 온 "문명 전환"의 의미가 크게 비쳐진 주제라서. 내 손으로 번역하게 될 것 같네. 번역 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가급적 안 맡으려 하지만 앞서 <China Model>이 중요한 주제를 잘 찌른 책이라서 맡았던 건데, 이 책은 더욱 요긴하게 생각되는군. 내가 꽤 큰 노력과 시간 들일 일이 어떤 건지 좀 설명해 두고 싶네.

번역판 제목을 "한문의 부활"로 생각하고 있네. 타자기가 대표하는 아날로그 시대에는 ​표의문자의 특성이 적응에 불리한 조건이었지. 같은 정보량을 입력하는 데 기술적 핸디캡이 있으니 한자문명권은 정보의 소통에 큰 오버헤드를 짊어지고 있었던 셈이지. 그런데 컴퓨터 환경에서는 오히려 표의문자가 유리하도록 형세가 역전되었어.

동음이자가 많은 한문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표시해 나가야 하는 기계론적-환원론적 기술체계에서 불편했지만, 여러 글자의 상호관련성을 자동적으로 파악해 주는 컴퓨터 환경에서는 더 편리한 걸세. 그 장점을 활용하는 기법 하나를 예시한다면... "한자문명권"을 표음문자로 입력하는 데 우리 말로는 15타가 필요하지. "Chinese linguistic sphere"라고 영어로 입력하려면 25타. 그런데 지금 중국어로 한다면 "hzwmq"라고 초성 자음 5타만 입력하면 그 조건의 컴비네이션 리스트가 빈도순으로 뜨거든. 선택에 1타, 확정에 1타, 총 7타로 임무 완수. 그중 선택의 1타도 필요할 때가 극히 적으니 6타나 마찬가지지.

'언어의 부활'에서 '문명의 부활​'을 읽는 것이 내 독법일세. 동아시아의 전통적 유기론적 사유방식이 근대세계의 기계론적-환원론적 풍조에는 적응하기 힘들고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한문-한자는 그 단적인 사례였다고 볼 수 있지. 이제 세상이 극단적 기계론-환원론을 벗어나 유기론 측면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중이라고 나는 봐 왔는데,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한 측면이 언어 방면에 나타난 거라고 보는 거야. 이 변화가 학술 분야에도 은근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지난 봄 베이징 워크숍에서 중국어가 학술용어로 역할을 키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면서도 생각했던 걸세.

이 책 번역을 내가 맡으면 "역자의 말"로 실을 논문을 하나 쓰려 하네. 내가 맡지 않아도 실어 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글이 필요한 게, 이 책이 결론부가 약해. 저자가 이 책​을 2부작의 제1부로 생각하거든. 타자기 시대를 이 책에서 다루고 속편에서 컴퓨터 시대를 다룰 계획이라는데. 그러니 핵심적 결론을 속편으로 미뤄둔 것으로 보이네. 내 생각엔 제1부인 이 책만으로도 우리 사회에 효용이 충분히 크기 때문에 (영어권보다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명권 여러 사회에 이 책의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속편 나오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이 책 하나로 주제를 완전히 드러내는 게 좋다는 생각이야.

앞으로도 이 책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이 정도로 맛만 보여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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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