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13. 10:16

 

이어서 나의 어릴 적 생활 속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주로 1953년 이후에 발생합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보편적 심리가 있었는데, 열네 살 이전에는 소년선봉대 대원을 하는 것이고, 열네 살 이후에는 응당 공산주의청년단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자연히 입단 원서를 냈습니다. 나는 당시 학교 전체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공인하는, 성품과 학업 모두 우수한 착한 학생이었는데도 입단을 거절당했습니다.

 

입단을 주선해준 친구는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사상-정치-행동에서 반혁명 부친과 반드시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열네 살 소년의 마음에 아버지는 신성한 것이었고, 혁명도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둘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너무나 잔혹했고, 물론 납득할 수 없었지요.

 

입단을 주선했던 사람은 좋은 친구였고, 내가 공청단에 가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와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으며, 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절박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기를 그가 희망하는지,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둘은 매우 긴장하여, 나도 그를 보고, 그도 나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되어 그는 묵묵히 일어났고, 나도 묵묵히 그를 입구까지 배웅했습니다. 공기가 너무 무거워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정말 다시 오지 말라고 그에게 충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친구는 여전히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는 조직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였고, 또 친구로서 그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러한 아버지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니 아주 무서웠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정신적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어 나는 두 번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문 교사 한 분이 나를 아주 좋아했고, 이 때문에 나는 문학과 연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계몽해준 이 선생님께 반드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의 자랑스러운 문하생이었다는 이유로 재난이 초래되었습니다.

 

1955년 반혁명 숙청운동 시기였습니다. 선생님은 이전에 국민당 계통 신문사의 편집자를 맡았었고, 해방 후에는 교사로 자리를 배분받았습니다. 그런데 국민당과의 관계로 인해, 그는 스스로가 국민당이 남긴 특수임무자임을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는 물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학교의 지도부는 나를 시켜 그를 움직여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은사와 당 사이에서의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나는 선생님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발언했습니다. 발언 후 선생님은 학생들의 도움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실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를 마주할 수 없었으며, 그 후 다시는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듣기로 그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고 했고, 나는 그를 매우 동정하면서도 시종일관 감히 만나지 못했습니다. 문혁이 끝나고서야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실명한 상태였습니다.

 

"군사부 일체"라 하는데, 이 중학생은 父도 부정하고 師도 부정하라는 요구를 君에게 받았군요. 나는 이 충격이 해방 후 4년 만에야 이 어린이에게 닥쳤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합니다. 인민공화국 수립 후 몇 년간 합작 노선의 연장선 위에서 포용적인 정치 분위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 어린이는 별 고민 없이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마음껏 소질을 키우고 있다가 1당독재를 굳히는 단계에서 충격에 마주치게 된 것이군요. 일전에 올린 그 어머니 이야기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이런 방향의 변화를 내다보고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이미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스승에게는 무슨 회한을 남길 이야기를 이 중학생이 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던 마음가짐을 보면 스승에게도 극단적으로 등을 돌리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지도부의 요구에 최소한 부응하면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의 발언을 하는 '타협'을 시도했을 것 같군요.

 

합리적 사고에 익숙하던 이 중학생이 '타협'이 가진 위험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 짐작됩니다. 도리에 맞는 범위의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겠지요. 그러나 지도부가 스승을 핍박하는 뜻에 맞는, 적어도 그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굴레가 됩니다. 그래서 스승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굴레가 사람들을 더욱더 적극적인 '타협'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첸 선생이 이 이야기를 나중에라도,(36년 후인 1991년의 글에 적었던 것이라 합니다.) 괴로워 하면서라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어느 선 이상의 '타협'을 거부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되는데, 험난한 세월 속에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그가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앞으로 그가 겪어 나갈 일을 계속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