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 미국인들이여, 국가가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보다 그대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를 먼저 물으시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어렸을 때는 내 귀에도 케네디 대통령 취임사(1961. 1)의 이 말이 멋있게 들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나 같은 10대 소년은 그렇다치고, 당시의 어른들에게도 이 말의 변태적 의미가 거슬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국가파시즘 관념이 "자유진영" 영도자의 감동스러운 말씀으로 통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지기는 좋아졌다.

 

사드 배치를 놓고 시끄럽다 보니 케네디 생각이 나서 관련 사실을 "Wikipedia"에서 한 차례 훑어보았다. 핵전쟁 위협과 관련된 오판을 열심히 했던 인물이라서 생각나는 거다.

 

1957년 10월 소련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 발사에 미국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핵전쟁의 양대 무기는 폭탄 자체와 운반수단이다. 폭탄에서는 미국이 앞섰으나 격차가 줄어들어 왔다. 그런데 이제 운반수단에서 소련이 확연한 우위를 보여준 것이다.

 

가상적의 위력을 과장해서 국민을 선동하는 싸구려 정치인은 어디에나 있다. 당시 미국에서 이 '안보 장사'를 제일 열심히 해먹은 것이 케네디였다. 그는 19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미사일 격차(missile gap)"란 말을 만들어내 톡톡히 재미를 보고, 2년 후 대통령선거에 다시 들고 나왔다. 아이젠하워 공화당 정부의 나약한 군사정책 때문에 미국이 군사적 열세에 몰렸다는 주장이었다.

 

소련은 미국인의 히스테리 반응을 즐겼다. 군사력을 부풀려 선전함으로써 서방진영을 위축시키고 공산진영을 고무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우리는 소세지 만들듯이 미사일을 만들어요." 능청을 떤 일도 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U-2기를 이용한 치밀한 정찰로 미사일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찰활동이 비밀이었기 때문에 정찰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다. 1960년 7월 민주당 후보 케네디를 초청해 합참의장, 전략공군사령관, CIA국장의 브리핑으로 비밀 정보를 제공했지만 케네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네디가 당선된 몇 달 후 미사일 격차는 오히려 미국 측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없는 위기를 만들어 안보 장사를 해먹은 케네디가 1962년 가을 '쿠바 미사일 위기'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은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이치일까?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미국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나라인 쿠바의 1959년 공산화는 세계대전에서도 본토의 위협을 거의 겪지 않은 미국인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케네디 취임 직후인 1961년 4월 쿠바를 침공하려던 "피그 만 사건"의 망신스러운 실패 이후에도 쿠바에 대한 미국의 야욕은 "몽구스 작전"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1961-75년 15년간 연 5천만 달러 예산의 이 작전이 계속되었다고 1989년 노엄 촘스키가 폭로한 바 있다. 2006년 영국의 한 텔레비전 특집에서는 CIA에 의한 카스트로 암살 시도가 638회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케네디 정부의 집요한 시도 앞에서 1962년 5월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와 소련 미사일 쿠바 배치에 합의했다. 10월까지 배치가 진행되어 실전 단계에 접근했을 때 미국은 비로소 이 사실을 확인했다. U-2기 정찰을 통한 상황의 완전한 확인이 케네디에게 보고된 것이 10월 18일이었다고 한다.

 

미사일 쿠바 배치는 소련에게 엄청난 전략적 이익이었다. 소련의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아직 개발 단계여서 겨우 4-5기 만들어 놓았지만 실전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미사일 격차" 히스테리를 통해 소련의 10배가 넘는 미사일과 핵탄두를 만들어놓고 최근에는 터키와 이탈리아에까지 배치해 놓고 있었다. 쿠바 배치를 통해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었다.

 

소련 미사일의 쿠바 배치에 대한 조치로 케네디 정부가 우선적으로 검토한 대책은 침공이었다. 피그 만 식으로 깨작거리는 게 아니라 정규전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쿠바군이나 이미 배치된 미사일의 반격은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법상 명분이 없고, 따라서 소련이 유럽에서 펼칠 반격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10월 28일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사이에 합의가 이뤄져 위기를 종식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쿠바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사드 배치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살펴볼 점이 있다.

 

위기가 증폭 과정에 있던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도르티코스 쿠바 대통령의 연설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득이한 무기, 우리가 갖추고 싶지 않았던 무기,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무기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 무기를 쓸 경우 쿠바가 잿더미가 될 것을 쿠바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쿠바가 미국의 침공을 받으면 소련은 쿠바를 버리고 유럽, 특히 서베를린에서 대가를 취하려 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카스트로가 미사일 배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소련 측이 설득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쿠바가 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인 것은 "울며 겨자 먹기"였다. 성립한 지 3년이 안 된 정권을 무너트리려고 막강한 미국이 체면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잿더미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미사일 배치를 허용했고, 결국 미국이 쿠바 침공을 획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중국 속담에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이 있다. 사드 배치는 그것을 싫어하는 세력이 이 땅을 공격할 동기를 만들어주는 짓이다. 1962년의 쿠바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경우 미국의 침공을 피할 수 없다는 절박한 조건 때문에 소련 미사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게 그런 절박한 조건이 없다면, 사드 배치는 정말 위태로운 불장난일 뿐이다. 전자파 갖고 옥신각신 하는 것은 집에 불을 지르면서 너무 더울까 걱정하는 꼴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