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확실히 이는 천지개벽의 대변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국민당 고위관료의 귀부인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반혁명 가족, 반동관료의 가족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적대하고 멸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게 됩니다. ... 그렇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 본래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 털어놓고 정신적 부담을 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수십 년간 침묵했습니다. 돌아가실 때조차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

 

어머니는 매우 겸허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정부의 모든 호소, 예를 들어 이재민에게 겨울옷을 부조하기, 대약진 시기 동과 철을 헌납하기 등에도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가도거민위원회가 우리 집에 있는 차고를 이용하여 학습반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흔연히 동의했을 뿐 아니라 모두와 함께 혁명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가도거민위원회가 집이 부족하다고 우리 집 아래층을 헌납하라고 했을 때에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동의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모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오고 나서도 그녀는 매우 예의 바르게 대했습니다. 나는 그때 뭘 그렇게까지 조심하느냐고 책망하며 물었지요. 어머니는 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나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집 앞이 바로 학교였는데도 홍위병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기로는 가도거민위원회가 도와서 여기 노부인이 아주 좋은 사람이니 폐를 끼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다가 결국 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나는 당시 일을 하던 귀주에서 한걸음에 남경의 어머니 병상 앞으로 달려왔고, 어머니가 거친 호흡을 이으며 "지난 몇십 년 결국 너희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구나"라고 말했던 것을 아주 똑똑히 기억합니다.

 

첸리췬(錢理群, 1939- )이 베이징대학(중문과)에서 퇴직한 후 자원해서 난징의 모교에 가 중학생을 두어 해 가르치다가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나이부터 교양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노 교수의 열의가 학생들에게는 시험 준비에 방해로 보였다고 한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첸 선생은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평생 중시한 분이라고 들었다. 2009년 가을 타이완의 교통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반가워했을 것도 족히 짐작이 간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타이완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兩岸의 彼此에 구애되지 않는 서술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나도 한국사를 국경의 안팎에 구애되지 않는 시각에서 서술하려 애써 봤거니와, 첸 선생이 취한 방법이 나보다 윗길임을 인정해 마지 않는다.

 

왜 윗길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천여 쪽의 책 시작부터 끝까지 마오쩌둥의 모습이 빈틈없이 깔려 있다. 그것도 사람의 모습으로. 마오쩌둥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그 마음에 중화인민공화국 60년 역사를 비춰본 책이다.

 

등장 인물이 마오쩌둥만이 아니다. 10세 나이에 건국을 맞은 첸 선생 자신의 모습이 모든 장면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서전'의 내용도 겹쳐져 있는 책이다. 부끄러웠던 일, 괴로웠던 일을 소탈하게 털어놓는 한 지식인의 눈을 빌려주기 때문에 이웃나라 역사지만 남의 역사 같지 않게 읽힌다.

 

첸 선생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명징하고도 투철한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도입부의 한 대목을 위에 옮겨놓았다. 틈틈이 읽어 이제 3분의 1 정도 책장을 넘겼는데, 도입부에서 품은 기대감이 계속 충족되고 있다. 번역(연광석)도 아주 좋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