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사태 앞에서 전에 쓴 글 하나가 생각나 옮겨 놓습니다. 로버트 카플란, <무정부시대는 오는가>(장병걸 옮김, 들녘 펴냄)에 추천사로 붙인 글입니다.

 

국가의 발생은 인간 사이의 투쟁의 양상을 바꿔놓았다. 생존의 기본조건을 획득4하기 위한 홉스 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개인 간의 투쟁이 억제되는 대신 국가의 국가에 대한 투쟁이 투쟁의 주류로 부각된 것이다.

국가 간의 투쟁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쟁점을 걸고 나오는 데 특징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데 성패가 걸린 투쟁인 만큼 보편성을 가진 명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구체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인데도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는 일이 많았다. 문화와 종교가 그 명분 노릇을 많이 해왔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철학적 명제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무정부시대가 오는가>의 저자 로버트 카플란은 인간의 투쟁이 형이하학적이고 구체적인 쟁점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문명의 핵심적 요소로 존재해온 국가의 기능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투쟁의 양상이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 이후의 여러 분쟁지역과 불안정지역을 두루 둘러본 카플란은 인구 팽창을 중심으로 한 자원 부족, 환경 오염, 질병 확산 등의 구체적 문제들이 이념의 포장을 뚫고 노골화되고 있으며, 분쟁을 억지하는 기존의 제도가 급속히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전면적 무정부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의 정책토론은 진보보수의 대결에 주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카플란은 진보와 보수가 엇갈리는 사각지대에 서 있다. 인류의 현재보다 장래를 걱정한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진보진영이지만 인권따위 섣부른 명분에 가려 현실에 눈감아서 안 된다는 그의 현실주의는 보수진영의 누구 못지않게 냉혹하다. 그래서 미국의 자기중심주의를 규탄하면서도 그 주도권을 제창하고, 키신저의 독단성을 혐오하면서도 그 정책의 타당성을 옹호하며, 세계평화의 꿈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강력한 첩보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두 진영 모두 카플란에게 배울 것이 있다. 상대방의 오류를 곧 자신이 옳다는 증거로 삼기에는 현실이 너무 엄혹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념과 명분에 소모할 힘을 합쳐 현실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더라도 승산을 크게 바라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그의 경고가 우리 귀에 특히 무섭게 울리는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졸업하기는커녕 아직 입문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발밑에는 탄탄한 땅이 언제나 있다고 믿고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펼쳐지고 있는 세계화의 큰 흐름은 달리기에서 수영으로 종목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물결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거센 강물 속의 수영으로.

새 종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흐름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화의 본질이 희망과 기쁨이 아니라 가혹한 물질적 조건에 있는 것이며, 무릉도원이 아니라 파멸의 낭떠러지로 향하는 것이라는 카플란의 경고가 기우이기 바란다. 주어진 경고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경고된 재앙을 피할 수도 있으나 묵살할 경우 그 경고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카플란의 말을 들으며 가장 절실하게 느낀 점은 바로 우리 사회가 현실 인식에 얼마나 둔감한가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나 민족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통일의 잠재적 의미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전반적으로 미약하다. 통일뿐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가 평행선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사회의 현실 인식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결함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주체성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지낸 20세기 한국사에서 일단 배경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는 속에서 20세기를 맞이하고 곧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해방이 되고도 새로운 외세에 휘둘려 민족국가를 온전히 이룩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마쳤다. 게다가 국내정치마저 권위주의 억압체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권력자에 대한 저항에 나선 한국 지식층은 현실을 논하기보다 이념을 따지기에 바빴던 것이다.

경제발전을 새로운 이념으로 받드는 작금의 세태 속에도 현실 인식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 성공하는 인류실패하는 인류로 분화하는 현상은 카플란 외에도 지적해온 이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세계화 논의는 성공의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카플란이 그려주는 참혹한 실패의 양상 속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듭 발견하면서 소름끼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의 이념을 하루아침에 휴지통에 던져넣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념을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쯤으로 여기던 시절을 과거로 돌리려면, 이념의 성취를 내일의 현실로 맞아들이려면, 현실 인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 현실에 작용하는 주체로서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우리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있다.

이런 노력에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정부주의가 오는가>. 십여년래 민주화가 결실을 맺어오고 있음에도 그 결과가 무질서와 분열의 확산으로만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북관계가 반세기의 질곡을 깨뜨리고 새 마당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의 실마리가 쉬 잡히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빈부 양극화의 새 세계 속에 우리는 어떤 위치에 어떤 자세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인가. 한국을 직접 다루지 않으면서도 이런 질문들에 놀라울 정도로 절실한 참고가 되는 책이다. (2001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