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이 소수당이 된 20대 국회, 원 구성에서부터 새누리당은 적응 장애 증세를 보이고 있다. 소수당이 되리라는 사실을 두 달 전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사정이나, 국회가 국회 노릇 못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자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증세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야당 간의 '야합'을 비난하는 꼴은 너무 졸렬하다. 아니, 당끼리의 의가 '야합' 아니면 뭐겠는가. '여합與合'을 너무 못하니까 야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국민이 많아서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 아닌가. '야합'이란 말이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는 데 기대어 야당 간의 합의를 무슨 못할 짓처럼 손가락질하는 꼴, 흠씬 두들겨맞은 양아치가 겉으로 소리도 못 내고 입속말로 구시렁대는 모습 같다.

 

나는 오히려 야당들이 국민이 원하는 '야합'을 충분히 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지난 8년간 국회가 국회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이 이 나라가 망쳐져 온 제일 중심이 되는 문제였다.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국회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문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한 차례 걸러내 해소할 것은 해소하고 억제할 것은 억제하는 것이 국회의 역할 아닌가.

 

7년 전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을라!"란 글에 (http://orunkim.tistory.com/184) 이렇게 썼다.


국회와 한나라당의 문제를 내가 크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로 보기 때문이고, 청와대와 이명박의 문제를 작게 생각하는 것은 없어도 괜찮은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 제도는 없애도 되지만 국회가 없는 세상을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명박은 없어도 괜찮지만 한나라당은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다. 이명박은 폐쇄적 소수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일 뿐이지만 한나라당은 이 사회 상당한 범위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누리당이 된 한나라당, 그 책임이 제일 크다. 대통령이 超제왕적 권력을 휘두르게 하는 이 나라 대통령제에 물론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국회 말고 누가 맡을 수 있는가? 권력자의 눈치보기에 급급해 국회의 역할을 등진 결과를 지금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까지 물려받아 오고 있는 초월적 권력의 대통령제를 만들기 위해 이승만이 획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1948년 5-10선거의 시행 주체는 미군정이었다. 그리고 5월 31일의 제헌국회 개원도 미군정의 '소집 공고'에 따라 이뤄졌다. 그런데 미군정은 소집하는 회의가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라고 했다. '국회 개원'은 이 소집에 따라 '최초의 집회'에 모인 당선자들이 스스로 한 것이었다.

 

선거 시행의 주체인 미군정이 국회 개원에서는 객석으로 물러선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엔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5-10선거 당시 유엔임시조선위원단(UNTCOK)이 선거를 감시했다. 선거가 끝난 후 충분히 공정한 선거가 이뤄졌는지를 놓고 위원단 내에 격론이 벌어졌다. 위원단은 독립적 위치에서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상하이로 옮겼는데, 위원단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회 성립'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5월 31일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가 열린 것이었다. 위원단은 6월 7일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6월 25일에야 5-10선거의 공정성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지를 받아 세워졌다고 흔히 주장하지만 1948년 5월 31일부터 6월 25일까지는 유엔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앞만 보고 달렸다. 6월 3일 국회에 30인의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회는 그 날로 유진오, 고병국 등 10인의 전문위원을 위촉했고, 전문위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헌법 초안을 내놓았다.

 

6월 3일의 초안 제출 후 16일 만인 19일에 기초위원회의 토론이 종결되었으니 가히 일사천리라 할 것이다. 초안이 잘 준비되어 있기도 했고, 위원회의 검토가 허술하기도 했다. 그런데 6월 19일 완성되어 있던 헌법안이 나흘 후 본원에 제출될 때 중요한 내용 하나가 바뀐 것이 있었다.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책임제로 바뀐 것이다. 6월 21일로 예정되었던 헌법안 본원 제출이 이틀 늦어진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6월 22일자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히 정부조직에 있어서 원안에는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으나 이승만 박사는 자초로 대통령제를 주장하여왔으며 지난 15일에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하여 대통령제를 주장하였고 또 20일에는 헌법을 기초한 의원들을 이화장에 초청하여 그러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 전반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하며 헌법 심의를 위한 전윈위원회 개최의 주장도 그러한 의도의 연장이라고 보이는데 결국 비공개 전원회의는 비민주주의적이라 하여 16차 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고 말았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5-10선거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당시 국회에는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책임제 추진이 국회에서 그렇게 뻑뻑했을까? 한민당과 무소속의 '야합' 때문이었다.

 

한민당은 이승만 친위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과 손잡고 분단건국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이제 정부를 수립하는 단계에 이르자 이승만의 권력 독점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한민당에게는 이승만 외에 대통령으로 내놓을 대안이 없었다. 그러니 대통령 자리를 그에게 주더라도 국회를 통해 자기네 권력 지분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는 한민당과 독촉, 그리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무소속이 3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과 무소속의 '야합'이 이승만에게 걸림돌이 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주장이 관철되게 한 한민당과의 '빅딜'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짐작은 간다. 국무총리 자리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한민당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 이시영이 이미 차지하고 있던 부통령 자리보다 국무총리의 역할을 훨씬 더 크게 하고 그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게 했다.

 

이승만이 끝내 국무총리 자리마저 허수아비로 만든 장면을 보면 지금 박근혜가 국회를 망가뜨리려고 광분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한민당만이 아니라 거의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며 동의를 요청했다. 국회에서는 토론도 없이 바로 표결해서 간단히 동의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을 불의에 임명했고, 부결을 거듭하기에 부담감을 느낀 의원들이 동의해 주고 말았다. 그 후 1954년까지 이승만은 다섯 명의 국무총리를 두고 열 차례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임명하면서 국무총리가 제 구실 못하게 갖은 애를 쓰다가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리를 아예 없애버리기에 이르렀다. 정말 대단한 뒤끝이다.

 

결국 한민당이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은 꼴이 된 것은 무소속과의 '야합'을 포기하고 이승만 세력과의 '여합'으로 돌아선 결과였다. 무소속과 연대하면서도 지분에 집착한 한민당에게 국무총리 자리가 미끼가 되었다. 이승만이 도와주면 국무총리는 자기네 것이려니, 이승만에게 대통령책임제를 주는데 국무총리 정도야 양보해 주려니, 김치국부터 마셨는데, 이승만이 정말 어느 정도로 뻔뻔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승만이 쉽게 한민당을 농락한 것은 한민당이 원하는 지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또는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행정력을 쥐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행정력이 국회를 압도하는 상황은 그렇게, 이승만의 술수와 한민당의 착각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과연 지금 장면에서도 집권자의 술수가 또 한 차례 주효할 수 있을까? 이제는 정말 국회가 국회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8년간 못 보아 온 '야합'이 그 열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