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Daniel Bell, <The China Model> (Princeton U P, 2015)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둘 중에서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할 기회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 예상된다. 기권자 중에는 정치적 책임감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는 책임감이 특히 강한 사람들 중에 기권이 많을 것 같다. 자기가 투표한 후보가 당선될 위험이 두려워서다.

민주주의 종주국 행세를 해온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과연 민주주의가 국민을 잘 만족시키는 제도인지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도 민주화를 이룬 지 30년째 되는데, 그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가. 아직도 경제 민주화까지 이루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민주화자체가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200년 넘게 민주공화국을 운영해온 나라 국민들이 갈수록 불만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가 짧다는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마침 번역을 맡은 책, 대니얼 벨의 <차이나 모델(The China Model)>에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 10여 년째 칭화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가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안팎의 압력에 대항해서, 중국의 정치 발전이 민주화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시한 책이다. “민주주의의 한계와 능력주의 정치체제라는 부제처럼 능력주의(meritocracy)가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현행 1당독재를 옹호하는 선전이라고 하는 비판을 저자도 많이 의식한다. 나와 주고받은 메일에서도 자기 주장이 규범적(normative)’ 담론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책 안에도 중국의 현행 제도와 관행에 대한 비판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은 엄정한 자세를 지키는데, 통념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 때문에 자신을 이단시하는 것이라고 불평한다.

핵심 개념인 ‘meritocracy’의 번역을 놓고 저자와 의견 마찰이 있었다. 저자는 能力主義가 온당치 않다며 賢能政治尙賢制를 권했다. ‘meritocracy’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목받아 왔는데, 그런 맥락에서 쓰여 온 능력주의를 피하고 싶다고 했다. 분배에 적용되는 경제적 능력주의아닌 정치적 능력주의를 자기는 뜻한다는 것이었다.

저자의 뜻을 알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중국 독자에게라면 현능정치상현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그러나 한자어를 쓰면서도 한자 자체에게서는 멀어진 한국 독자들에게는 어색할 것 같다. 그리고 중국 독자에 비해 미국식 민주주의 관념에 더 깊이 길들여진 한국 독자에게는 현능정치’, ‘상현제처럼 좋은 뜻을 풍기는 용어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이런 뜻을 알리면서 이렇게 붙여 썼다.

책읽기를 하나의 여행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생각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 출발점은 독자에게 익숙한 장소로 정해준 다음, 책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저자와 역자가) 보여주고 싶은 장소로 안내해 가는 편이 더 쉽고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벨 교수는 즉각 답장을 보내 한국 독자의 성향과 그에 대한 전략의 판단을 전적으로 역자에게 맡긴다는 뜻을 알려주었다. 교신을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였는데, 핵심 개념의 표현을 선선히 맡기는 데는 나도 감동했다. 이를 통해 상호 신뢰가 세워져 저자로부터 최고 수준의 협력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의 목차는 이렇게 되어 있다.

 

서론

1장 민주주의는 과연 제일 덜 나쁜 정치체제인가?

2장 능력주의 정치체제에서 좋은 지도자를 뽑는 방법

3장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문제점들

4장 민주적 능력주의 체제의 세 가지 모형

결론: ‘차이나 모델을 실현시키는 길

 

민주주의에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나서려면 왜 대안이라는 게 필요한지, 민주주의의 한계가 무엇인지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1장에는 (1) 다수의 전횡, (2) 소수의 전횡, (3) 투표집단의 전횡, (4) 유능한 개인주의자의 전횡이 민주주의체제의 일반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있다. 운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옹호자들도 최상의 체제아닌 제일 덜 나쁜 체제라고밖에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오늘의 미국 유권자들이 클린턴과 트럼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지 명쾌한 이해가 가능하다. 선거민주주의에는 온건한 지도자들에게 너무 많은 핸디캡을 안겨주고 별난 인간들만 활개 치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

2장에는 능력주의 정치체제가 자격 있는 지도자의 선발에 유리한 점이 설명되어 있다. 1장에서 지적된 민주주의체제의 문제점에 대비할 때 능력주의체제의 유리한 점은 분명히 이해된다. 저자가 말하는 지도자의 능력이란 것이 포괄적 의미를 가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식과 사고력만이 아니라 사교능력, 덕성처럼 통상적인 능력주의논의에서 제외되는 요소들이 들어간다.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여러 가지 특성들이 아울러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3장에는 오늘의 중국 정치체제가 보여주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능력주의체제의 약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어 있다. 권력 남용, 즉 부패나 권력집단의 폐쇄성처럼 흔히 지적되는 문제들은 기술적 대처가 어렵지 않은 것으로 저자는 본다. 저자가 근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합법성(legitimacy)’ 문제다. 인민의 위임을 확인하는 선거민주주의체제와 달리 능력주의체제의 권력의 근거에 대해서는 쉽게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능력주의를 결합한 민주적 능력주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4장에는 두 원리의 결합을 위한 몇 가지 모형이 검토되어 있는데, 지속가능한 실현성을 저자가 인정하는 것은 지방-하층부는 민주주의 원리를 중심으로, 중앙-상층부는 능력주의 원리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수직 모형이다. 저자가 특히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은 실험공간으로서 중간층이다. 두 원리의 결합에 참고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시행착오의 위험이 크고, 그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험공간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론부에는 두 원리의 배합을 중심으로 저자가 바라는 중국의 정치 발전 방향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현행 체제에 대한 비평이 곁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신랄한 비판을 보면 중국 권력집단의 나팔수라는 비방을 피하려는 뜻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지엽적인 여러 문제에 비판이 쏠려 있고 중요한 기본 문제는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 없이 순조로운 개혁의 진행을 기대하는 입장이다.

결론부의 마지막 몇 쪽 중국을 넘어란 제목의 절에는 중국이 능력주의 정치체제를 잘 발전시킬 경우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 제기되어 있다. 중국 밖의 독자에게는 특히 흥미로운 주제이고 저자 본인도 매우 중시하는 논점인 듯한데, 중국의 정치개혁 방향 제시에 주력한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 취급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체제 도입에 이어 아랍권의 재스민 혁명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민주주의의 위신이 추락 중인 작금의 상황에서는 능력주의가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능력주의 정치체제의 시행 사례는 이 책에 두 갈래로 소개되어 있다. 광범위한 시행 사례로 중국의 전통적 유교정치체제가 과거제를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현대의 상황에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따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싱가포르(1960년대 이후)와 중국(1980년대 이후)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능력주의 원리를 공식적-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중국에서 체계적 시행이 확장되고 유교정치체제에 관한 연구가 심화하는 데 따라 벨 교수의 주장에 대한 호응이 커질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