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원고 청탁을 너무 적게 받는 것이 늘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내 공부가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는 데 따른 것이다. 강연이건 기고건, 찾아주는 데가 있으면 공부로 얻은 생각을 펼칠 기회로 반갑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최근 꼭 쓰고 싶은 원고의 청탁을 사양한 일이 있다. 어느 정부산하기관의 관보에 싣도록 일본의 식민지배에 관한 짧은 글 하나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청탁서를 보내기 전에 전화를 걸어온 편집자에게 청탁 방향을 대충 듣고 반갑게 응할 뜻을 밝혔다.

 

그런데 나중에 받은 청탁서에 이런 귀절이 하나 들어 있었다.

 

"다만 OOOO은 정부산하기관인지라 정치색이 드러나거나 부정적인 시선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주의사항이 왜 필요한 것일까?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그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에 당당한 자신감이 있다면, 원고 청탁에 저런 주의사항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써 온 글을 살피면 어떤 정치색을 어느 정도 드러낼지 짐작이 갈 것이고, 짐작보다 조금 더하든 덜하든 드러내는 정치색은 필자의 것 아닌가. 발행인과 편집인은 너무 이상한 소리 안 할 만한 필자를 찾아 "내키는 대로 써주세요."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정부산하기관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지만, 몇 해 전부터 꼭 필요하지 않은 부문까지 지나치게 정권에 보조를 맞추도록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조그만 원고 청탁 하나에서 이 불안이 더 짙어진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