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실업과 예스24의 김동녕 회장은 마주치면 "형님"으로 대하는 분이지만,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다. 그분 어머님과 우리 어머니가 이화여전 시절부터 친구로 이화여대에서 정년까지 함께 봉직한 사이라서 집안끼리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4년 선배인 그분을 어려서부터 형님으로 대해 왔다. 그분이 사업가로 나선 뒤로는 별로 만날 일 없이 지내게 되었는데, 워낙 어려서부터 정이 든 사이라서 그런지 10년을 안 만나다가 마주쳐도 그냥 '형님'으로 느껴지는 분이다.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는 분이라서 안 보고 지내는 중에도 글에 올릴 때가 있다. 이 블로그의 글 중에도 두 차례 그분을 언급한 일이 있다.

 

이윤재 선생님께 보내는 책에는 사인 위에 "동녕 형을 부러워하며"라고 써넣었다. 그 아드님, 우리 큰형보다 한 살 밑인 김동녕 선배는 큰형 못지 않게 모범생에 효자로 내가 보는 이다. 이 선생님께 전화드릴 때 정정하신 것을 치하드리느라고 "저는 동녕 형이 부러워요~" 하곤 하는데, 사실 어머니가 요새만큼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기만 하다면 동녕 형도 별로 부럽지 않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08년 12월 15일자다. 진짜 모범생에 효자다. 나는 수십 년 불효자 노릇 하다가 잠깐 효자 노릇 한 것 갖고 티를 무척 냈는데, 동녕 형님은 티 하나 안 내면서 한결같다. 내가 그 형님 부러워한 것보다 우리 어머니가 그 어머님을 수백 배 부러워했을 거다.

 

예스24 김 회장님은 저도 잘 아는 분이지만 한국 기업가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공익 마인드가 강한 분이죠. 형님이 이 사회에 공헌할 역량을 가진 분이라고 그분이 여겼기에 사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형님에게 돈 쓸 생각도 하셨겠죠. 그런데 형님이 검소한 생활 자세를 지키고 있다면 김 회장님의 제안이 있더라도 공익을 위해 직접 쓰는 길을 권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형님, 월 434만 원씩 받으면서 그 밥값을 하셨다고 정말 생각하세요?

이건 09년 9월 정운찬 형님께 보낸 공개편지의 한 구절이다. 김 회장이 사업에 나서던 70년대는 요즘에 비해서도 기업가의 이미지가 좋지 않던 때였다. 사업을 하려면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해야 한다는 게 통념이었다. 훨씬 점잖은 진로를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는 천하의 범생이가 사업에 나선다는 데 주변 어른들이 다 의아해 했다. 어머니 친구분들 함께 앉은 자리에서 어느 분이 "동녕이 걔가 뭘 잘못 먹어서 그런 생각을 하냐?" 하던 말씀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다.

 

김 회장에 관한 생각을 적어놓을 생각이 불쑥 든 것은 이번 비엣남 여행 중 얻어먹은 일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내가 졸라서 대접받는 일이 좀체 없는데, 이번에는 한세 비엣남 공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연락드려서 일행과 함께 호치민 시 부근의 공장을 안내받고, 거기서 일하는 분들께 저녁 대접까지 잘 받았다. 안 하던 짓 하게 된 연유를 한 차례 짚어놓고 싶은 마음에서 적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친구분들 찾아뵙기는커녕 연락도 잘 드리지 않고 지내게 된다. 바쁘고 무심하고 게으른 탓도 있지만, 더러 생각이 나도 먼저 떠나신 친구분 기억을 떠올려 드리는 게 잘하는 짓인지 자신이 없다. 김 회장 어머님께도 1년에 한 번이나 겨우 문안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비엣남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김 회장 생각이 났다. 비엣남 사업에 한국 기업 중 앞장서서 진출한 것이 한세실업이기 때문이다. 길이 달라 그분 사업에 관심 없이 지내 왔는데, 비엣남까지 가면서 모른 척 지나가기가 민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하니 비엣남을 처음 구경가면서 한국 기업의 비엣남 사업을 살펴보는 것도 그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장 구경을 청할 생각을 하고 전화를 드렸다.

 

마침 해외 출장중이시라기에 전화 건 뜻을 비서에게 알렸다. 몇 시간 후 비서가 전화해서 견학을 주선해 드리라는 회장님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4월 7일에 한세 공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아침에 호텔까지 와서 우리를 픽업해준 김상률 차장이 비엣남어를 전공하고 비엣남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분이라서 한세 사업만이 아니라 비엣남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게도 무척 실속 있는 오리엔테이션이었고, 일행 모두 만족해 했다.

 

모처럼 김치, 깍두기까지 곁들인 공장 식당의 점심식사까지 참 고마운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마음에 걸리는 게... 시내의 저녁식사 초대까지 덥썩 받아들인 것이다.

 

하노이 도착 직후 김 차장과 통화할 때 견학날 저녁식사까지 모시고 싶다는 뜻을 들었다. 일정이 확정되는 데 따라 응답하겠다고 당장은 대답했지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누고 싶은 얘기는 점심때까지 다 나눌 수 있을 텐데 저녁식사를 따로 모신다는 것은 '향응'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공장 식당의 점심식사가 너무 검소하기 때문에 손님 맞는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회장님 아는 사이라 해서 그분들 저녁식사 시간까지 빼앗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다. 말 듣자마자 바로 거절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중 연락할 때 바쁜 일정을 이유로 사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6일 호치민 도착하자 문제가 생겼다. 호치민 거주하는 분 한 분이 안내해 주겠다고 했었는데 급한 일로 갑자기 출장을 가버렸다. 하노이에서는 그런 대로 안내를 잘해 주던 이병한 선생마저 서울 처음 온 시골뜨기 꼴이다. 택시기사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삥삥 돌아서 미터 올리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엉뚱한 데다 내려놓으니 미칠 노릇이다. 식당에서도 계산서가 주문할 때의 예상보다 갑절이나 나오고...

 

이렇게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다 보니 움직이기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 8일에는 메콩강 데이투어 예정이고 9일에는 하노이로 돌아올 참이니 문제는 7일 점심때까지의 한세 견학 뒤였다. 저녁을 좀 괜찮은 곳에서 비엣남식으로 해야 할 텐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잡을 길이 없다. 그런데 저녁 초대를 사양하면서 초대한 분들에게 우리끼리 가서 먹을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7일 아침 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김 차장에게 일행을 소개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행색을 보고도 저녁 초대의 뜻이 바뀌지 않았다면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녁 밥값을 한세실업에서 내준 거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데, 현지법인장과 김 차장 두 분의 저녁시간까지 뺏은 것은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흥미로운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일행에게야 더욱더 고마운 일이었지만. 두 분께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세실업 잘 되기 비는 마음을 이렇게 적는 것밖에 보답할 길이 없다니... 저녁은 얻어먹으면 안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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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