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1. 12:14

보슬비가 이제 걷히고 있다. 비엣남 도착 이래 만난 비가 모두 소나기였는데 오늘아침에는 캄캄한 새벽부터 옷 젖는 줄 모를 만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날씨도 무척 선선하다. 창문을 닫아놓고 자는데도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다.

 

그저께 호치민 떠나던 날 그곳 기온은 38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 저녁무렵 하노이 도착을 앞두고 기내방송에서 하노이 기온은 24도라고 했다. 두 곳 사이의 기후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북위 21도의 하노이나 11도의 호치민이나 다 같은 아열대기후려니 생각했는데, 하노이는 그래도 온대기후에 가까운 모양이다. 겨울철에는 차이가 더 크다고 한다. 하노이에는 10도 아래쪽의 혹한(!)이 닥칠 때도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아무런 예비조사도 없이 무턱대고 와서, 체계적 관찰을 하지 못하고 인상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중 중요한 인상을 받은 것이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차이다. 호치민이 1975년까지 미국 영향 아래 있었다는 거야 천하가 아는 사실이거니와, 호치민을 비롯한 남부지방(코친차이나)이 근세 들어와서야 비엣남왕국에 편입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나도 근년에야 알았다. 이 역사적 차이가 오늘의 상황에도 여러 모로 비쳐보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우선 길거리에서 사람들 생김새를 보더라도 호치민 시민들은 종족 배경이 복잡한 느낌을 준다. 비엣남은 인구의 87%를 점하는 비엣족(낀족) 외에 50여 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다민족국가라 한다. 대부분 소수민족은 교통이 힘든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어서 일반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비엣족 안에 편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표준문명을 어느 수준 이상 받아들이면 혈통에 관계없이 한족으로 규정된 것처럼 이곳에서도 주류사회에 편입되기만 하면 역사적 배경을 불문하고 비엣족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닌지. 하노이나 호치민이나 인구 대다수가 비엣족이란 사실은 마찬가지인데, 호치민에서는 신체적 특성의 편차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였다. 18세기까지도 비엣남왕국에게 정복 대상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또 하나 차이는 뭐랄까, 마음의 편안함 같은 것이다.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부터 우리 일행의 주목을 끈 것이다. 우리 기사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고,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중에 남보다 앞서려고 튀는 움직임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서부터 사람들을 조금씩 마주쳐 볼 때, 뭐든 특별히 잘하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고 마음먹고 상대방을 골탕먹이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사람의 미소는 좀체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도착한 날 저녁에 맥주 한 잔 걸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건너다가 자전거와 부딪칠 뻔했다. 길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가득하기 때문에 모두 끊임없이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며 다녀야 한다. 내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부딪칠 뻔한 것이고,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년 사내는 충돌을 겨우 모면한 다음 순간 얼굴을 밝은 웃음으로 채우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내가 외국인인지 뭔지 살필 겨를도 없는 순간이었다. 위험을 피했다는 기쁨이 저절로 얼굴에 나타난 것이었다. 위험을 겪은 데 대한 분노보다 위험을 피한 기쁨을 더 잘 일으키는 마음!

 

호치민 인심도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노이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 비하면 현대도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일행도 악질 택시기사를 두 차례 만난 일이 있고, 그곳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에서도 상당 수준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별난 곳은 하노이다. 오늘날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놓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제 두 차례 주택가를 산보했다. 중산층과 서민층이 같은 골목 안에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며 50년 전의 서울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집안이나 집밖이나 나무가 많고, 대부분 집이 거실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문을 열어놓고 살고 있다. 신기하고 궁금하다. 지금 세상을 어떻게들 저런 식으로 살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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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