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요약을 앞에 붙입니다.]
1. 집약적 농업문명에서 형성된 ‘국토’ 관념
서양 언어에 ‘국토’를 가리키는 제도적 용어가 없는 까닭이 무엇일까? 근대 민족국가가 생기기 전까지 유럽에 군주는 있어도 국토는 없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집약적 농업문명의 발달에 따라 국토 관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었다. 그러나 그 관념은 농업생산력과의 관계 위에서만 의미를 가졌다.
국토만이 아니라 개인의 토지 소유권도 농업생산의 필요에 따라 빚어졌다. 근대의 배타적 소유권과 달리 농경지에는 소유권과 경작권이 나란히 존재했다. 집약적 농업생산, 특히 벼농사에서는 경작자가 권리의 주체로서 책임감을 갖고 경작에 임하지 않으면 효과적 관리를 통해 장기적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2. 유럽 근대국가의 영토 경쟁과 만국공법 체제
잉글랜드에서 15세기에 시작된 인클로저 현상은 장원의 공유지를 영주의 소유지로 사유화하는 과정이었다. 배타적 소유권 개념이 도입되면서 공유지에 대해 부분적 권리를 갖고 있던 일반 주민들이 배제되고 모든 토지를 특정인의 재산으로 확정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식민지시대 초기에 토지 등기제도가 도입되면서 토지에 대한 농민의 부분적 권리가 부정되었다.
농지에서 시작한 토지 상품화 현상은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모든 토지로 넓혀졌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자원이 상품가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군주들이 국토를 종합적-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떠오르게 되었고, 국토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럽 내의 영토 경쟁은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져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면했으나 근대적 만국공법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천하체제는 국가의 크고 작음을 현실로 인정하고 ‘사대(事大)’와 ‘자소(字小)’의 유기적 관계를 추구한 것이다. 만국공법 체제는 이와 달리 형식적 평등으로 실질적 불평등을 감추기 때문에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체제다. 형식적 민주주의 아래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3. 독도 문제: 1951년의 실책은 만회되어야 한다.
일본이 독도와 댜오위다오에 대해 소유권, 어업권 등 근대적 개념을 먼저 적용시킨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몇 십 년 동안 일본은 근대적 제도를 갖추고 있고 조선과 청나라는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자기네 제도 안에 끌어들인 것이다.
1951년 일본과 연합국 간의 강화조약을 토론하던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깔끔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당시 한국 정부는 무책임한 태도로 놓쳐버렸을 뿐 아니라 일본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일본은 패전 후 억울한 땅까지 빼앗긴 것이 있다.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다케시마’ 문제의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반 일본인에게는 그렇게 억울한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은 섬이라면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예단이 작용할 수 있다.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 요구와 연계해서 공조할 가능성은 없을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과거 침략 문제가 충분히 처리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 중국과 한국이다.
4. NLL은 평화를 위한 경계선이어야 한다.
해상에서도 두 정부 사이의 경계선이 필요한데, 이것은 휴전선 획정의 취지에 따라 양측 사이에 합의되어야 한다. 그 취지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계선에는 경계선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는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1974년 작성된 미국 CIA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유엔사 해군 단위들이 특별허가 없이는 이 선의 이북으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하여 사고를 회피”하는 목적을 위해 유엔사령부 해군구성군 사령관이 설정한 것으로서 “한국 해군사령관의 지휘권 및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군사력에만 적용된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의 군사독재정권도 북한을 무시 내지 적대하는 경향을 답습했다. NLL은 그런 상황 속에서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많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21세기 한국인의 NLL 인식은 1987년 이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검토 위에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5. 소모적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좌익사상
21세기 한국 사회에 수십 년 전 반공독재 시절에 주입된 대결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지금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백여 년 전 제국주의시대의 관념이 관성의 힘으로 남아있다. 대립지향적인 이 관념은 인간사회를 독립적 개체의 집합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끈질긴 지속력을 갖고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이 관념은 협력보다 경쟁 측면에 중점을 둔다.
유럽국가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먼 곳에 식민지를 확보해 힘을 얻으려 한 제국주의시대, 그리고 지구 반대쪽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고 이웃나라와 싸우던 냉전시대가 모두 ‘원교근공’의 추세를 보여준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그리고 유럽의 근대에 이런 추세가 부각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중국의 철기혁명,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자원 획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을 때였다.
근거를 잃고 공장과 도시로 유입한 사람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빠졌고, 이에 따라 사회의 안정성 문제가 생겼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제기된 공산주의는 문제의 원천을 배타적 소유권에서 찾은 것이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자원의 한계와 환경 문제에 겹쳐 자본주의 금융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면서 사회경제정책의 전반적 좌경화가 전망되고 있다.
6. 시대착오적 포클랜드전쟁의 교훈
포클랜드가 영국 식민지로 남아있는 것을 제국주의시대의 흔적으로 규정한 남아메리카 민족주의는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영유권 주장에는 그만한 타당성이 없다.
아르헨티나가 1982년 2월 포클랜드의 귀속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점령하여 전쟁을 일으킨 까닭은 1976년 이래의 군사정권이 거듭된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자 도박에 달려든 것이었다.
국토만이 아니라 많은 주제에 대한 지금 사람들의 생각 중에는 과거에 만들어진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통념이 만들어질 때의 역사적 상황과 지금 상황 사이의 차이 때문에 이뤄져야 할 인식의 변화가 실제로 이뤄지기까지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산업혁명 덕분에 절제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원교근공’의 근대적 상황이 어떻게 해소되어 왔는지 생각하며 이웃과의 어떤 갈등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평화에 위협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투철하게 할 필요가 있다.
1. 집약적 농업문명에서 형성된 ‘국토’ 관념
‘국토’는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그런데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에는 국토 개념을 바로 나타내는 제도적 용어가 없다. 영어의 경우 ‘territory’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제도적 의미에서 이 말이 쓰이는 것은 정상적 방법으로 편성, 운영되는 ‘국토’와 대비되는 의미의 ‘영토’의 뜻이다. 19세기에 미국이 새로 취득한 중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루이지아나, 미주리 등 ‘테리터리’ 형태로 운영했고, 하와이와 알라스카는 1950년대 말 주 승격 때까지 ‘테리터리’였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와 괌이 미국의 ‘테리터리’로 남아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에는 ‘테리터리’로 운영되는 인구 희박지역이 있고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남아있는 해외식민지를 ‘테리터리’ 개념으로 보유하고 있다.
‘국토’의 뜻으로 널리 쓰이는 영어 단어는 그냥 ‘land’다. 9-11테러 후 테러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미국 관서 이름이 ‘국토안전부’로 번역되는데, 원명은 ‘Homeland Security Department’다. ‘Land’는 국가 개념과 관계없이 쓰이는 말이다.
서양 언어에 ‘국토’를 가리키는 제도적 용어가 없는 까닭이 무엇일까? 언어학자들은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모르겠으나, 역사학도로서 나는 동아시아에 비해 유럽에서 ‘국토’ 개념이 새로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근대 민족국가가 생기기 전까지 유럽에 군주는 있어도 국토는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한 중세 유럽 국가의 영토는 군주의 사유물이었다. 지참금, 상속 등 개인적 방법으로 취득한 영지가 유럽 이 구석 저 구석에 널려 있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의 영토는 그 휘하 영주들이 각각 다스리는 영토의 단순집합일 뿐, 프랑스 국토나 잉글랜드 국토로 통합성을 갖지 못했다. 왕이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군대 안에서도 각 영주가 자기 영지에서 데려온 자기 부대를 지휘했다.
그것이 중세 봉건제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달리 국토 개념이 일찍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의 ‘변법(變法)’이 국토의 통합적 관리에 주목적을 둔 것이었고, 한나라 때 오초칠국의 난(기원전 154년) 이후 군현제가 확립되면서 국토가 황제권의 확고한 기반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초기인 11세기에 그와 같은 수준의 국토 개념이 세워졌다. (통일신라에서는 새로 획득한 지역을 식민지 비슷한 지배 대상으로 여긴 것 같다.)
동아시아에서 국토 개념이 일찍 확립된 이유는 집약적 농업사회의 성격에 있었다. <사기>의 흉노에 관한 서술에서 이 점을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 있다. 한 고조 유방이 해하에서 항우를 물리쳐 천하를 얻은 몇 해 후 흉노를 정벌하다가 크게 혼난 일이 있다. 32만 대군을 손수 이끌고 흉노를 추격하다가 평성 지역에서 매복에 걸려 7일간 포위당하고 있다가 뇌물과 계략을 써서 겨우 풀려난 일인데, 이를 ‘평성지곤(平城之困)’이라 하여 후세까지 황제의 곤경을 상징하는 일이 되었다.
이때 흉노의 선우(單于, 흉노족 최고지도자)가 묵돌(冒頓, ‘묵특’이라 읽기도 한다.)이었다. 원래 흉노는 중국 북방과 서방의 여러 오랑캐 중 특별히 강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묵돌 선우 때 거의 모든 다른 세력을 복속시키고 중국에 새로 세워진 제국과 맞서는 자세를 약 백년간 유지하게 된다. 중국의 선진 기술을 급속히 도입한 성과로 보인다.
흉노의 세력을 일으킨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국의 흉노 관계 기록에서 묵돌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기> “흉노열전”에도 묵돌의 일화 몇 가지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묵돌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호가 세력이 강하였는데, 묵돌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두만[묵돌의 아버지]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이에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그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돌은 이렇게 말하였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얼마 뒤에는 묵돌이 자기들을 무서워하고 있는 줄로 안 동호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선우의 부인과 첩] 중에 한 사람을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묵돌이 또 좌우에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하였다. “동호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연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병해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돌은 이렇게 말하였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게 보내주었다.
이로써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침략해왔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황무지가 버려져 있었다. 쌍방은 각각 자기들의 변경의 지형에 따라서 수비 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는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수비초소 이외의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하였으면 좋겠소.” 묵돌이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건 버려진 황무지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돌은 크게 성을 내며 말하였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후퇴하는 자는 즉시 죽이겠다.” 동호는 처음에 묵돌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하였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묵돌은 돌아오자 이번에는 월지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누번왕, 백양하남왕 등의 영지를 병합하였다. 또 연과 대를 공격하여 일찍이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사기열전 중>(정범진 외 옮김, 까치 펴냄) 803-804쪽)
수준 높은 전략이다. 모욕적인 요구에 응함으로써 적을 방심시키고 우리 편의 적개심을 고취해 놓았다가 일거에 봇물 터뜨리듯 터뜨리는 전략. 더욱 놀라운 것은 동호 정벌에 바로 이어 전 방위 정복사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치밀한 자원 준비와 배치 없이 실행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전국시대에 발달한 중국의 병법을 유목사회에 적용시킬 만큼 깊이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전략의 결정적 고비에서 ‘국토’의 의미를 부각시킨 점이 눈길을 끈다. 유목민은 농경민에 비해 영토 감각이 약하다. 주변세력의 변화뿐 아니라 기후의 변화에 따라서도 활동영역을 쉽게 옮기는 것이 유목민이다. 활용하고 있지 않은 땅을 동호가 요구했을 때 묵돌의 일부 신하들이 그냥 내주자고 한 것은 유목민의 상식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태도를 보인 신하들을 당장 죽여 버린 목적이 종래 상식적인 것이 아니던 ‘국토’ 관념을 강력하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묵돌이 도입한 중국 병법은 영토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가 이끄는 흉노가 단기간에 광대한 유목지역을 석권한 중요한 이유 하나가 영토 개념의 도입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묵돌은 새로 세운 흉노제국의 조직에도 좌우 현왕(賢王)과 좌우 녹려왕(谷蠡王) 등에게 영토를 나눠 맡기는 중국식 분봉(分封) 제도를 도입했다.
묵돌의 흉노제국은 근 백년간 한나라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지키고 있다가 무제의 대규모 정벌로 무너지고 말았다. 무제의 전략은 장기 소모전이었다. 농경제국의 생산력을 배경으로 병사와 전마를 깨진 독에 물 붓듯 10여 년에 걸쳐 쏟아 부은 것이다. 농업사회의 영토는 생산력의 근거인데, 유목사회인 흉노제국에 도입된 영토 개념은 군사적 관리에 가치가 있을 뿐, 생산력 관리에는 큰 효용이 없었던 차이를 파고드는 데 무제 측 소모 전략의 요점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이미 전국시대부터 ‘국토’ 관념이 뚜렷해지고 있었던 사실을 <춘추좌씨전>의 “넓은 하늘 아래 왕(천자)의 신하 아닌 사람 없고 어느 땅 끝까지도 왕의 것 아닌 땅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臣 率土之濱 莫非王土)”는 말에서 알아볼 수 있다. 군주의 통치권이 땅과 사람 양쪽으로 맺어진 것은 다스리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세 부과 방법도 땅과 사람 양쪽이었고, 차츰 땅 쪽으로 집중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집약적 농업문명의 발달에 따라 국토 관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었다. 그러나 그 관념은 농업생산력과의 관계 위에서만 의미를 가졌다. 1712년 청나라 황제가 목극등을 보내 정계비를 세울 때까지 백두산 주변 산악지대의 국경선은 엄밀히 규정되지 않고 있었다. 조직된 농업사회가 없는 지역에서는 행정관할권이 성립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국토만이 아니라 개인의 토지 소유권도 농업생산의 필요에 따라 빚어졌다. 근대의 배타적 소유권과 달리 농경지에는 소유권과 경작권이 나란히 존재했다. 집약적 농업생산, 특히 벼농사에서는 경작자가 권리의 주체로서 책임감을 갖고 경작에 임하지 않으면 효과적 관리를 통해 장기적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명목상의 토지소유권을 모두 왕에게 귀속시키는 왕토(王土) 사상도 소유권과 경작권의 분리 필요에서 파생된 것이었고,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에서 경작권이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2. 유럽 근대국가의 영토 경쟁과 만국공법 체제
유럽의 장원에도 배타적 소유권이 약했다. 개인의 배타적 소유 대상은 집 곁의 조그만 텃밭뿐이었고, 경작지, 목초지, 임야 등은 공동 이용의 대상이었다. 이것을 영주의 소유로 볼 것인가, 아니면 주민의 공동소유로 볼 것인가? 잉글랜드에서 15세기에 시작된 인클로저 현상은 장원의 공유지를 영주의 소유지로 사유화하는 과정이었다. 배타적 소유권 개념이 도입되면서 공유지에 대해 부분적 권리를 갖고 있던 일반 주민들이 배제되고 모든 토지를 특정인의 재산으로 확정한 것이다.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게 된 지주들은 인건비를 줄이는 쪽으로 ‘경영 합리화’를 추진했고, 이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농지에서 유리되어 도시와 공장으로 유입함으로써 산업혁명의 인적 자원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현상이 식민지시대 초기에 일어났다. 토지 등기제도가 도입되면서 토지에 대한 농민의 부분적 권리가 부정되었다. 원래 농지의 소유권은 공동체 원리 내지 유교 이념의 제약 아래 있었다. 소작인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소작료를 마음대로 올릴 수 없었다. 시장 원리가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등기제도가 도입되자 지주들이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하고 소작인의 경작권을 부정하도록 통치당국이 유도했다. 그 결과 5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농지에서 유리되었고 그 대부분이 생업을 찾아 만주, 일본 등 국외로 이주했다. 국내에는 그들을 흡수할 근대산업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의 대량유출은 ‘식민지근대화론’의 뚜렷한 반증이다. 농촌에서 대거 빠져나온 인구를 국내 산업에 활용하지 못한 식민지 조선은 근대화의 음지에만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현상은 상업 발달에 따른 토지의 상품화 현상이었고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의 기초가 되었다. 농지에서 시작한 토지 상품화 현상은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모든 토지로 넓혀졌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자원이 상품가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군주들이 국토를 종합적-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떠오르게 되었고, 국토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렇게 태어난 근대국가는 국토에 대한 강한 집착을 특징으로 했다. 이 흐름에 따라 국토를 확보하지 못한 유태인과 집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국토 확장의 경쟁으로 인해 전쟁이 격증했고, 산업혁명이 늘려준 생산력이 그 많은 전쟁을 가능하게 했다. 유럽 내의 영토 경쟁은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져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유럽 밖의 영토를 찾아 나선 유럽인들 앞에는 두 가지 상이한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강고한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던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이었다. 국가가 없거나 취약하던 영역이 먼저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식민지의 영역이 기존 질서와 관계없이 유럽세력의 점령-관리 능력에 따라 획정되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는 수백 개 정치조직이 자리 잡고 있던(그리고 수십 개 언어가 쓰이고 있던) 곳인데 화란동인도회사의 경영 지역으로 통합되었다가 네덜란드 식민지가 되었다.
인도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비교적 확고한 실체를 갖고 있던 지역은 19세기 들어서야 본격적 식민지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실체가 더 확고하던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은 제국주의시대까지도 유럽인의 직접 경영 능력 밖에 있어서 일본의 제국주의 진입 여지를 주었다.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면했으나 근대적 만국공법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만국공법 체제는 지역 내의 국가 간 유대관계를 해체하고 각국을 원자화함으로써 약소국을 체계적으로 침탈하기 위한 기반조건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킨 강화도조약(1876)에서부터 조선의 ‘독립’을 강조한 것이 조선과 청나라를 묶어주고 있던 천하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지도자로서 ‘독립’문 현판을 쓰게 된 사정이 이런 것이었다.
천하체제는 국가의 크고 작음을 현실로 인정하고 ‘사대(事大)’와 ‘자소(字小)’의 유기적 관계를 추구한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부형(父兄)처럼 받드는 대신 큰 나라도 작은 나라를 아껴줄 책임을 갖는 불평등관계다. 만국공법 체제는 이와 달리 형식적 평등으로 실질적 불평등을 감추기 때문에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체제다. 형식적 민주주의 아래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3. 독도 문제: 1951년의 실책은 만회되어야 한다.
근대적 영토 개념이 만국공법 체제와 함께 들어왔다. 조선의 기존 영토 개념도 상당히 엄밀한 것이었지만, 먼 바다의 무인도에 대해서는 영토 의식이 없었다. 인민 없는 공간을 통치 대상으로 여기지 않던 농업사회의 인식 한계였다. 이 점에서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독도와 댜오위다오에 대해 소유권, 어업권 등 근대적 개념을 먼저 적용시킨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몇 십 년 동안 일본은 근대적 제도를 갖추고 있고 조선과 청나라는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자기네 제도 안에 끌어들인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독도를 우리 땅으로 여기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얄밉고 억울하다. 그러나 이웃한 두 나라가 감정적 대립에만 묶여있으면 문제 해결이 어렵고 두 나라 모두 피해가 커질 수 있다. 일본 극우파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한 가지 예다. 한국에서도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감정은 정부의 외교적 입장에 제약을 가할 수 있을 정도다.
정책 수립과 수행에 아무 책임 없는 일반인 입장에서는 독도 문제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어떻게 가지고 어떻게 표현하든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직자 입장에서는 “다들 우리 거라고 하니까” 하는 정도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 일이 아니다. 일본 입장에서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감안해서 관점을 세워놓아야 효과적 대응이 가능하다.
이 점을 소홀히 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놓은 일이 실제로 있다. 1951년 일본과 연합국 간의 강화조약을 토론하던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의 일이다. 독도 문제를 깔끔히 정리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당시 한국 정부는 무책임한 태도로 놓쳐버렸을 뿐 아니라 일본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05년 이래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은 넓은 의미의 ‘침략’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1951년의 강화회담은 패전국 일본이 침략했던 영토를 뱉어내는 자리였다. 1차적 반환 대상은 1930년대 이후에 침략한 땅이었지만, 그 전에 침략한 땅도 침략 사실이 분명하면 역시 반환 대상이었다. 한국은 연합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회담 주체로 나서지 못했지만 미국 등 다른 연합국의 인정을 받을 경우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였고, 미국은 한국의 주장을 청했다.
이 때 한국 정부는 독도와 함께 대마도를 요구했다. 대마도에 대한 요구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수정 요구를 청했다. 그러자 한국은 독도와 파랑도를 요구했다. 미국은 두 섬의 위치 등 정확한 내용을 청했는데, 한국은 제공하지 않았다. 파랑도의 위치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독도의 위치도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두 섬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이것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은 패전 후 억울한 땅까지 빼앗긴 것이 있다. 일본의 국수주의자들만 억울하게 느끼는 게 아니라 제3자가 봐도 억울한 점이 꽤 있다.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다케시마’ 문제의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반 일본인에게는 그렇게 억울한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은 섬이라면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예단이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제3국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1945년 이전 일본의 침해를 받은 주변 나라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보상과 반환을 받을 기회를 가졌다. 보상 문제는 당시 만족할 만한 타결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토 반환 문제가 당시 제기되지도 못했다면 문제가 없는 거라고 봐야 할 것 아닌가?
한국 요구를 대변해 주겠다고 나섰다가 독도 문제를 묵살해버린 미국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러나 요구를 정확히 하지 못한 당시 한국 정부의 책임이 더 앞서는 문제다. 존재하지도 않는 파랑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우리 땅’ 독도의 경도와 위도조차 미국 대표단에게 알려주지도 않은 한국 정부, 일방적인 믿음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분쟁의 씨앗을 후손에게 남겨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의 독도 문제에 관해서는 정병준, <독도 1947> 제8장 참조)
한국은 독도에 ‘실효적 지배’를 펼치고 있다. 독도 귀속 문제에 있어서 이 실효적 지배가 한국의 유리한 점이고, 이 이점의 가치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에 관한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명확히 처리할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독도의 한국 귀속에 불만을 가진 일본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실효적 지배에 그치지 않고 더 명확한 처리를 위해 노력할 여지가 남아있는 일이다.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 요구와 연계해서 공조할 가능성은 없을까? 1951년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을 대표한 것은 국민당정부였고, 중화인민공화국에게는 발언 기회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과거 침략 문제가 충분히 처리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 중국과 한국이다. 한국은 미국을 통해 요구할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셈이지만, 직접 강화회담에 나서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의 기회에 제약을 가한 것이었다. 한국 혼자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면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비슷한 문제를 중국과 함께 들고 나선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4. NLL은 평화를 위한 경계선이어야 한다.
북한까지 포괄한 한국 전 국토의 경계선 중 북한 영토와 러시아, 중국 사이의 국경은 북한이 설정해 놓은 것이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60년대 초에 중국과 변계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중국 쪽 양보가 많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강상 도서는 대부분이 북한에 귀속되었다. 최근 특구 개발로 각광받고 있는 황금평이 제일 큰 섬의 하나인데, 변계조약 후의 퇴적에 의해 중국 땅에 붙어있다. 당시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두 길 보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후하게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지만, 중국이 과거 천하체제의 ‘사대-자소’ 이념에 끌린 면도 있었던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영토 경계선 중 가장 긴장된 것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국경 아닌 국경이다. 휴전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그대로 동결시킨 것이기 때문에 육상에서는 아무 애매한 문제가 없다. 해상 경계선도 해안선이 단순한 동해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데,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들이 뒤얽혀 있는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이 거듭해서 문제를 일으켜 왔다.
정치권 일각에서 NLL을 마치 국경선처럼 주장하고 NLL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마치 국토를 팔아먹는 매국노처럼 몰아붙이는데, 잘못된 주장이다. 우선, NLL은 국가 간 영해를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므로 ‘국경선’이 될 수 없다. 한반도 전체를 각각 자기 영토로 주장하는 두 정부 사이의 활동 영역을 구분하는 휴전선과 같은 성격의 경계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1953년 7월 유엔군과 중국-북한군 사이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육상의 휴전선을 명확히 규정했으나 해상의 경계선을 빠뜨렸다. 해상에서도 두 정부 사이의 경계선이 필요한데, 이것은 휴전선 획정의 취지에 따라 양측 사이에 합의되어야 한다. 그 취지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임시조치의 성격을 가진 정전협정이 60년 가까이 되는 기현상을 불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 체결의 필요선이 제기되어 있는데, 평화협정에서는 해상 경계선도 명시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 전이라도 해상 경계선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남한의 반공독재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서 합의의 여건이 잘 마련되지 못했다. 1953년에 대한민국이 협정 당사자로 나서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전 반대에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을 위한 전쟁 계속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남북 간 긴장 강화를 원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정전협정을 보완하기 위한 해상 경계선 협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를 계승했으므로 해상 경계선 문제는 냉전 해소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두산백과>에는 NLL에 대해 “1953년 정전 직후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북한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해상경계선”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계선에는 경계선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는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NLL이 정전 직후 설정되었다는 통념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1974년 작성된 미국 CIA 비밀보고서를 근거로 NLL이 1965년에야 설정된 것이라고 존스홉킨스 대학 서재정 교수가 최근 <경향신문>(2012년 10월 30일)과 <프레시안>(2012년 10월 26일) 기고문에서 밝힌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사 해군 단위들이 특별허가 없이는 이 선의 이북으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하여 사고를 회피”하는 목적을 위해 유엔사령부 해군구성군 사령관이 설정한 것으로서 “한국 해군사령관의 지휘권 및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군사력에만 적용된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NLL은 한국 해군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설정한 유엔군의 방침일 뿐이지, 어선이든 군함이든 북한 선박의 활동에 제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두 개의 주체 사이에서 상호 합의를 통하지 않고 상대방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려 드는 것은 전쟁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3년에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전회담도 외면했다. 남북 간 긴장이 정권 유지에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증폭시키려 애썼고, 미국은 이것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일본과의 사이에 ‘평화선’을 주장한 데도 또 하나의 긴장관계를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1960년대 이후의 군사독재정권도 북한을 무시 내지 적대하는 경향을 답습했다. NLL은 그런 상황 속에서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많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정치권 일각의 “NLL 사수” 주장은 그 인식이 아직도 씻겨나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21세기 한국인의 NLL 인식은 1987년 이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검토 위에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5. 소모적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좌익사상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만주 지역(중국의 ‘동북’ 지역) 일부를 고구려의 고토라며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민족국가 고려와 조선이 통치해 본 일이 없는 지역을 ‘민족의 땅’이라고 하는 이런 주장을 나는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로 본다. 과잉민족주의는 제국주의시대에 유행한 호전적 민족주의로서 침략전쟁의 선동에 널리 쓰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살던 땅이라 해서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네덜란드를 생각해 보라. 로마인, 오스트리아인, 스페인인, 프랑스인이 그 땅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한 때의 지배권을 근거로 현재의 귀속을 주장한다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수십 년 전 반공독재 시절에 주입된 대결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지금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백여 년 전 제국주의시대의 관념이 관성의 힘으로 남아있다. 대립지향적인 이 관념은 인간사회를 독립적 개체의 집합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끈질긴 지속력을 갖고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이 관념은 협력보다 경쟁 측면에 중점을 둔다.
중국사에서 대립지향적 관념이 풍미한 시대가 전국시대인데, 국제관계에 있어서 ‘원교근공책’이 득세한 시대였다. 국가 간 관계의 본질이 경쟁에 있다면 인접국 사이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것이니, 먼 나라와 힘을 합쳐 가까운 나라와 싸우는 것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럽국가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먼 곳에 식민지를 확보해 힘을 얻으려 한 제국주의시대, 그리고 지구 반대쪽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고 이웃나라와 싸우던 냉전시대가 모두 ‘원교근공’의 추세를 보여준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그리고 유럽의 근대에 이런 추세가 부각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중국의 철기혁명,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자원 획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을 때였다. 먼 나라와의 싸움과 달리 가까운 나라끼리의 싸움은 전면적 소모전이 되기 쉽다. 생산력이 급격히 발전하는 시기가 아니라면 원교근공 정책은 금세 자원을 고갈시키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는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배경으로 펼쳐진 시대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인간도 원자론적 ‘개인’으로 파악하면서 무한경쟁의 길을 연 시대였다. 그 열쇠가 배타적 소유권이었다. 전통시대에는 한 자락의 논에도 소유권과 경작권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지주의 권리 행사에 제약을 가함으로써 ‘함께 사는 세상’을 지켜나갔다. 그런데 배타적 소유권이 도입되자 지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경영’ 때문에 수백만 농민이 농지를 떠나야 했다.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계속되고 있던 ‘팽창의 시대’에는 수많은 농민이 농촌을 떠나더라도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거를 잃고 공장과 도시로 유입한 사람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빠졌고, 이에 따라 사회의 안정성 문제가 생겼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제기된 공산주의는 문제의 원천을 배타적 소유권에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농민을 받아들일 만한 도시와 공장의 발전조차 없어서 대다수 이농민이 고향을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고국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좌익사상이 양심적 지식인들의 마음을 끈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소유권 절대화에 대한 지나치게 극단적인 반발이라서 현실에 대응하는 효용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서는 소유권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적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여러 층위의 사회주의 정책이 20세기를 지내는 동안 널리 확산되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자원의 한계와 환경 문제에 겹쳐 자본주의 금융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면서 사회경제정책의 전반적 좌경화가 전망되고 있다.
6. 시대착오적 포클랜드전쟁의 교훈
사회경제정책에서 경쟁을 완화하는 좌경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국가 간 경쟁도 21세기 상황에서는 완화되지 않을 수 없다. 영토 분쟁도 20세기 이전에 비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는 국제적 압력이 늘어날 것이다. 순수한 영토 문제를 이유로 한 최근의 전쟁이 포클랜드전쟁(1982년)이었는데, 이 전쟁의 성격과 결과를 살펴보면 전쟁이라는 수단이 앞으로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해 활용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포클랜드가 영국 식민지로 남아있는 것을 제국주의시대의 흔적으로 규정한 남아메리카 민족주의는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영유권 주장에는 그만한 타당성이 없다. 세계지도를 보면 아르헨티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거리가 500킬로미터 가까이 된다. ‘부속도서’라고 할 수 없는 거리다.
포클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관계도 빈약하다. 스페인 식민지로 있다가 1816년 독립을 선포한 아르헨티나가 1830년을 전후해서 포클랜드에 손을 뻗쳐보려고 한 일은 있지만 확고한 지배권을 세워보지 못했고, 영국의 포클랜드 지배권은 1833년 이후 공백 없이 계속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이민의 결과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영국계이고, 나머지 인구도 거의 다 유럽계다.
전쟁 전에 영국은 남아메리카 민족주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포클랜드의 적극적 경영을 자제하고 있었다. 12,173 평방킬로미터 면적(부산과 울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크기)에 아직도 인구가 3천 명 전후인 포클랜드에는 개발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합리적 정책은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포클랜드 개발에 참여를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포클랜드의 독립을 후원하고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1982년 2월 포클랜드의 귀속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점령하여 전쟁을 일으킨 까닭은 무엇이었나? 1976년 이래의 군사정권이 거듭된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자 도박에 달려든 것이었다. 그 결과 당시의 포클랜드 인구보다 더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는(그중 3분의 2가 아르헨티나군) 전쟁을 치렀고, 군사정권은 그 이듬해에 무너졌다.
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승전국인 영국은 이득을 봤을까? 인명 피해는 차치하고, 이 전쟁은 영국의 정치상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 전 위기에 빠져 있던 대처의 보수당 정권이 이 전쟁 덕분에 다음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될 수 있었다. 그 득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평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국내 정치가 외부 요인에 의해 교란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국제질서 안에서는 승전국이라 하여 제국주의시대처럼 엄청난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편 전쟁 중 설치된 지뢰의 제거 작업은 2019년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국토만이 아니라 많은 주제에 대한 지금 사람들의 생각 중에는 과거에 만들어진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통념이 만들어질 때의 역사적 상황과 지금 상황 사이의 차이 때문에 이뤄져야 할 인식의 변화가 실제로 이뤄지기까지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그런 인식 착오가 현실에 어떤 파탄을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독도 분쟁의 불씨를 키워놓은 이승만 정권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과연 지금의 우리가 NLL에 대해 반공군사정권 때와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그 때와 지금의 역사적 상황을 비교해 보며 판단해야 할 것이다. 독도 문제의 해결 방법을 모색함에 있어서는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업혁명 덕분에 절제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원교근공’의 근대적 상황이 어떻게 해소되어 왔는지 생각하며 이웃과의 어떤 갈등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평화에 위협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투철하게 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평화가 사치품이나 기호품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평화가 필수품인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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