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민족의식은 있지만 민족주의는 없다.”
민족주의란 민족의 가치를 발판으로 하는 정치이념이다. 한국이 북한과 관계되는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북한이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민족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정책을 놓고 과거 우리 민족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것도 민족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정치적 판단에 이념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개인이 가진 민족의식과 구별되는 것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주의의 바탕이다. 뚜렷한 민족의식이 없는 사회에서 정치이념으로서 민족주의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민족주의는 민족의식이 표현되는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매우 강하다. 한반도라는 꽤 명확한 범위의 공간 속에서 하나의 언어를 쓰며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지낸 기간이 1천 년이 넘는다. 통일된 민족국가의 역사 1천년을 가진 민족은 전 세계에 한민족 하나뿐이다. 민족의식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민족주의는 매우 약하다. 독도니 뭐니 사안이 있을 때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것은 정치이념으로서 민족주의가 아니다. 민족의식일 뿐이다. 정치이념이라면 모든 정치적 의제에 지속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빈부 양극화 문제를 놓고 “같은 민족 사이에 생활양식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것은 나쁜 일 아닌가?” 하는 면도 생각하고 과잉개발 문제를 놓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우리 민족의 공간을 후손에게 이런 꼴로 물려줘도 되나?” 하는 면도 생각해야 민족주의가 살아있는 것이다.
어느 분야보다도 민족주의의 역할이 커야 할 대북정책에서도 현 정권 들어서서는 민족의 가치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민족인 미국의 대북정책과 같은 민족인 한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한국의 대북정책이 미국보다도 오히려 더 경직된 쪽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명박이나 현인택을 나쁜 놈이라고 욕할 생각은 없다. 사상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는 민족의식 적게 가진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가 너무 약한 것, 민족주의를 외면해도 표 얻는 데 별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문제다.
강한 민족의식과 약한 민족주의 사이의 격차가 문제다. 나는 민족주의가 ‘정의(正義)’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의 가치가 자유의 가치나 평등의 가치를 억누르지 않기 바란다. 여러 가치들이 서로 어울려 정치 담론의 안정된 틀이 운영되기 바란다. 그런데 민족의 가치가 일상적 정치 담론에서 너무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수시로 격렬한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정치 불안정의 큰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문제다. 좋은 음식 재료를 많이 가지고도 조리방법을 몰라 배를 곯는 꼴이다.
“민족은 과연 ‘상상의 공동체’일 뿐일까?”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우리 사회에 있다. 그중에는 뉴라이트처럼 정략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시장경제를 극단으로 끌고 가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정책에 민족주의가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게 근대화의 은혜를 감사하고 이승만의 민족분단 정책에 대해서도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공적을 찬양한다.
그런 주장에 대해 나도 <뉴라이트 비판>으로 반박한 바 있지만, 사실 학문 차원에서는 반박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가 자유, 평화 등 보편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의 지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쟁과 대형범죄에 민족주의가 역할을 맡은 역사를 반성하는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일본에서는 그밖에도 ‘국민주의’, ‘국가주의’, ‘내셔널리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얼마간씩 다른 범주의 개념을 구분해서 부르는 것인데, 그 구분이 아주 명쾌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하기는 힘들지만 구분의 필요는 분명히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서 쓰겠다.
민족주의는 보통명사로 쓰겠다. 글머리의 정의대로 “민족의 가치를 발판으로 하는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내셔널리즘은 고유명사로 쓴다. 근대유럽에서 발생해 근대세계에 유행했던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민족주의의 특정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민족주의 비판에 근래 유력하게 쓰여 온 말이 “상상의 공동체”와 “발명된 전통”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Imagined Communities 와 에릭 홉스봄이 테렌스 레인저와 함께 엮은 책 The Invention of Tradition 제목에서 나온 말이다.
두 책 모두 1983년에 나온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은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유럽에서 자라나 왔는데, 전쟁과 학살을 미워하는 정서 차원의 태도로 시작되었다. 이 태도가 보편화된 뒤에 이론적 뒷받침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서 생각할 때 앤더슨과 홉스봄의 비판 대상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내셔널리즘이다. 두 사람은 유럽의 역사적 경험으로서 내셔널리즘을 고찰한 것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두 사람의 관점을 ‘역사주의(historicism)’라 부른다.
‘전통의 발명’ 측면을 보자.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해 민족의 전설과 영웅,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내는 데 문인, 사상가, 정치가, 교육자들이 큰 노력을 쏟았다. 우리 민족도 일제시대에 근대 내셔널리즘을 도입한 후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노력의 분량도 그 성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근대 유럽에서 민족 전통을 ‘발명’할 필요가 컸던 것은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민족의 실체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 주민의 정체성에서는 ‘기독교인’ 또는 ‘유럽인’의 비중이 컸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들 사이의 싸움이 많아지니까 형제와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점보다 별개의 민족임을 강조하게 되면서 전통 발명의 필요가 일어난 것이다.
유럽인의 전통 발명은 민족의식을 빚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한민족의 민족의식은 발명품도 아니고 가공품도 아니다. 천여 년간 민족국가 안에 살면서 키워온 ‘자연산’이다.
‘상상의 공동체’ 측면은 어떤가. 아놀드는 상상의 중요한 내용으로 민족의 범위와 민족의 주권, 두 가지를 꼽았다. A 민족과 B 민족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이 있다는 상상, 그리고 각 민족은 정치적 주권을 가진다는 상상을 말한 것이다.
한민족의 경우 민족의 범위에 대해서는 상상의 필요가 아예 없다. 한반도라는 꽤 명확히 구분된 공간 안에서 1천 년간 지켜온 민족국가의 범위, 그것이 바로 민족의 범위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권 역시 민족국가에서 자연스럽게 누려왔다.
민족의식이 약하던 유럽에서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강력한 내셔널리즘을 채용한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었고, 그 자체가 폭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아놀드와 홉스봄의 비판은 내셔널리즘의 작위성과 폭력성을 표적으로 한 것이다. 그런 작위성과 폭력성은 모든 민족주의의 필수적 요소가 아니다.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는 식민지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개항기 이전의 한민족은 이민족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민족의식이 정치에 발현될 필요도 별로 없었고, 근대 내셔널리즘처럼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민족주의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민족의 정치적 주권에 대해서도 배타적 절대주권을 생각하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은 대부분 기간을 통해 중국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배타적 절대주권이 아니다. 중국 황제인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체제 안의 한 조공국으로서 제한된 주권을 고려와 조선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고려와 조선은 대등한 입장에서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나라로서 본분을 잘 지켜왔으니, 댁도 큰 나라의 본분을 지키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우위를 존중해주면서 실속을 챙겼다. 중국과의 관계에 비용을 절약하는 자세였고, 여진과 왜 등 다른 이민족과의 관계에도 중국의 도움을 받았다. 민족국가를 1천 년이나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의 하나다.
천자 중심의 천하체제는 근대 만국공법 체제와 다른 성격의 국제관계 원리였다. 천하체제는 유기론적 세계관에, 만국공법 체제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 열강에게 첫 번째 과제가 천하체제의 해체였다. 일본은 이것을 배워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진출의 명분으로 삼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대주의’란 말을 만들어 사대관계를 폄하한 데는 조선을 천하체제에서 이탈시키고 조선인이 자신의 역사에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근대문명의 힘에 압도된 조선인들은 이 선전을 통해 근대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였고, 이로부터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가 빚어져 나왔다. 식민지시대의 조선 민족주의는 피해의식 때문에 권리 주장에 치우치고 힘을 숭상하는 근대 내셔널리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최남선, 이광수처럼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옮겨간 사람들을 놓고 흔히 ‘변절’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차이에 입각해 명쾌하게 설명한 논문이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에 실린 조관자의 논문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다. 내셔널리즘의 원리에 따르면 ‘친일 내셔널리스트’만이 아니라 ‘친미 내셔널리스트’도 가능한 것이라고 조관자는 말한다.
"이광수는 미군정이 친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지 않고 반공주의 국가를 준비하는 것에 안도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던 '친일'에서 '친미'로 돌변한 모습을 보고 그를 '변절의 천재'인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다. 적어도 이광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충실했다.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적'인가, '친일적'인가, '친미적'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 변수에 불과하다."(552쪽)
끝 문장에서 ‘민족주의적’을 ‘친일적’, ‘친미적’과 대비시킨 점이 주목된다. 조관자는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힘의 욕망”으로 보기 때문에 친일과 친미의 태도가 모두 여기에서 나올 수 있는, 진정한 민족주의를 등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민세 안재홍(1891-1965)은 ‘신민족주의’를 제창했다. 안재홍은 벽초 홍명희와 함께 단재 신채호(1880-1936)의 민족주의를 세상에 알리는 데 공이 큰 인물이었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1945년 9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원고지 2백 매 가량의 글로 발표된 후 더 확장되지 못했지만 그 지향은 분명하다. 식민지인의 민족주의와 독립민족의 민족주의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안재홍이 제시한 민족주의 발전의 길은 남한에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반공을 내세운 독재세력의 민족주의 탄압은 일본제국주의보다도 심했다. ‘통일’은 금기어가 되었고, ‘민족’이란 말도 함부로 꺼내기 힘든 세월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민족의식은 독재자들이 수시로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객체였지, 정치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45년 이후의 한국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1945~87년 사이의 남한을 ‘신식민지 체제’로 보는 시각을 검토하고 있다. 1950년대에 유럽국들의 많은 식민지가 충분한 독립 준비 없이 세계정세에 떠밀려 독립을 얻었다. 이 나라들이 형식적 독립을 얻고도 실제로는 옛 지배국에 의존하며 통제받는 입장에 오랫동안 머무른 것을 신식민지 체제라 한다. 남한 역시 형식적으로만 독립하고 미국에 대해 의존과 통제의 관계에 매여 있었던 것을 일종의 신식민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신식민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차적 기준을 나는 민족주의에 둔다. 식민지인의 민족주의는 지배자에게 전수받는 내셔널리즘의 틀로 빚어지고, 겉보기로는 지배자를 적대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배자를 닮아가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오리엔탈리즘’의 원리다. 이광수의 내셔널리즘이 민족의 전통 아닌 힘의 욕망을 본질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친일 내셔널리스트로의 전향이 용이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내셔널리즘 틀을 뛰어넘는 민족주의의 발전을 보지 못한다면 식민지 상태와 본질적 차이가 없는 신식민지 상태라고 나는 본다.
안재홍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연관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민세 안재홍 선집 2> 16쪽)
사회 속에서 개인의 활동에 경쟁과 협력의 측면이 모두 있는 것처럼, 국제사회 속에서 민족과 국가의 활동에도 양쪽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내셔널리즘은 경쟁의 측면만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고, 국제사회 속에서 주체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피지배민족은 더더욱 경쟁의 측면에만 시선이 묶이게 된다.
사회 안에서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억압의 대상이 된 개인이나 집단을 생각해 보라. 억압자들은 피억압자들이 무능한 ‘루저’라고 비웃으며 자기네 ‘능력’으로 억압을 정당화한다. 피억압자는 억압 없는 사회를 꿈꾸기보다 자기도 능력을 키워 억압자의 입장으로 옮겨가기를 바라기가 쉽다. 세상을 바꾸기보다 나 하나 바꾸기가 더 쉬운 일 아닌가. 이광수도 조선민족 대신 대동아민족을 택하는 단 한 차례 ‘전향’으로 얼마나 인생이 풍요로워졌던가.
식민지 민족주의는 그런 환경 속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불리한 조건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신세를 개선하는 데 몰두해서 사회에 대한 공헌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심성을 띤 것이 식민지 민족주의다. 오늘날 위정자가 ‘국격’을 들먹여 잘 살기 경쟁만을 부추기며 우리보다 어려운 위치에 있는 ‘동포’들에게 배려를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가 식민지 민족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놓고도 그 나라 사람들 입장을 배려하는 논의가 꽤 활발하게 일어난다. 40여 년 전 베트남 파병을 놓고 우리 이익만 생각하며 책임을 전혀 생각지 못하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군사독재가 끝난 후 자라난 ‘시민의식’이 일상적 피해의식을 벗어나 행위의 주체로서 책임감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결과다.
민족주의가 건전한 정치이념으로 역할을 맡을 여건은 1987년 이후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고 안정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 독도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간도도 우리 땅!”을 외쳐서 독도를 넘보는 일본 극우파와 똑같은 짓을 다른 이웃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식민지 민족주의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것이다.
사실, 40여 년간 남한의 반공독재는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이념의 건전한 발전을 틀어막았다. 이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이념 민주주의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성숙하고 안정된 모습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의 논리가 아직도 이 사회에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 사회는 1987년 이후에야 정치의 발전이 시작되었고, 아직까지 충분히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 그 성장을 위해 챙겨야 할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민족주의다. 불뚝불뚝 터져 나오는 민족감정이 아니라 꾸준한 정치 발전의 자원으로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문명의 위기에 대응의 주체를 세워야 한다.”
교통, 통신, 교역 등 민족 간 접촉의 확대, 발전에 따라 현대사회에서는 민족의 울타리가 느슨해지거나 심지어 허물어지기까지 하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오면서 인간의 존재 양식이 변화를 겪은 것처럼 민족의 존재 양식도 변화를 겪는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울타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얘기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사망할 테니까 잘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 없다고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국가의 역할이 전보다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변화는 ‘세계화’란 이름 아래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세계화의 방향이 좀 이상하다. 세계화라면 ‘세계주의’를 향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개인주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정치적 세계화가 아니라 경제적 세계화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인간사회 속에 인간의 새 자리를 잡아 주는 조직 작업 없이 자본의 전 세계적 조직화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를 좋아하는 속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체성과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근대 내셔널리즘이 고취한 국가정체성이 약화되면 다른 층위의 정체성이 보강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지금의 세계화는 개인의 고립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일까? 이 변화가 더 심화되면 인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지난 행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대 내셔널리즘이 협력보다 경쟁에 치중한 경향에 특히 음미할 점이 있다.
‘경쟁’은 내셔널리즘만이 아니라 모든 근대정신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항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계급 간의 대립과 투쟁에 중점을 둔 정치이념이었다.
적정한 수준의 경쟁에는 사회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지만 과도한 경쟁은 낭비를 가져온다. 그래서 인간사회에는 협력적 행위와 경쟁적 행위 사이의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원 공급이 급격히 확장된 근대 상황에서는 낭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경쟁 측면을 중시하는 정치이념이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를 지내는 동안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고 환경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 정치조직의 강화를 통해 지나친 경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의 원인인 모순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더 격화시키면서 자기만 빠져나갈 길을 찾기도 한다.
지금의 세계화를 끌고 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노선도 반동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1% 대 99%”의 구조 문제가 지금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거니와, 신자유주의는 권력을 가진 1%가 전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자기네 특권을 지키고, 나아가 더 키우려는 반동노선이다. 그들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99%의 저항하는 길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작은 정부’를 외치며 국가정부의 약화를 꾀하는 그들이 강력한 세계정부의 출현을 원할 리 없다. 99%가 원자화된 개인으로 머물러 조직적인 저항력을 갖지 못하기를 그들은 바란다.
반동노선에게 ‘승리’는 있을지언정 ‘성공’은 있을 수 없다. 시대의 요구를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각해졌을 때 여러 방향에서 경고가 있었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제국주의라는 반동노선에 집착했고, 그 결과는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파국이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도 승리에 집착하며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인류문명의 위기는 몇 십 년 전부터 자원과 환경 방면에서 분명해져 왔다. 권력을 쥔 1%의 반동노선이 위기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 몇 해 전부터 불거진 금융계의 파탄은 한 세기 전 제국주의의 모순과 같은 반동노선의 산물이다. 대응의 주체를 새롭게 만들어 세울 필요가 있고, 그래서 전 세계적 가버넌스(governance, 協治)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버넌스 형성의 한 사례로 유럽공동체의 발전을 바라본다. 산업혁명과 근대 내셔널리즘을 탄생시키고 그로 인한 참화를 집중적으로 겪은 유럽인들은 내셔널리즘에서 유로피어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다. 유럽공동체의 행보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위기의 대응 주체를 세워나가는 기본 의미는 분명한 것으로 나는 본다. 자연스러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응의 주체로 서기 위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전통시대 우리 민족의 대외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원리로 삼았다. 중국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활용하되 그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문화를 형성했다. 왜, 여진 등 이웃 민족들과는 안정된 공존의 길을 찾았다. 개항기 이후 외세의 침략 앞에서 이 원리가 무너졌다.
외세의 침략은 조선인의 민족의식까지 침략해서 식민지 민족주의를 만들어냈다. 근대화의 광풍을 뚫고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 그런 민족은 세계의 변화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가를 더 열심히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민족주의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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