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월 중에 8회 정도로 "해방일기"를 요약하는 강연을 해볼까 하고 주제를 설정해 봤습니다. 강연회 주선은 프레시안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강연은 기회 있는 대로 열심히 다닐 생각인데, 이 정도 주제 범위를 설정해 놓으면 초청받는 자리에 따라 적당히 주제를 조합해서 강연 내용을 꾸릴 수 있겠지요.

 

 

[조선 독립의 약속 카이로선언]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은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의 항복 후 연합국의 오스트리아와 조선 점령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해방’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전리품으로서 ‘정복’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

항일투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다. 연합국의 눈에는 일본 패망에 대한 조선인의 공헌이 무시할 만한 정도였다. 1930년대까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도 전쟁 중에는 밀려나 있었고 화북의 조선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할 수준이 못 되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내에서 항일의 자세를 지킨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에 있었지만 일제 말기 전쟁 중에는 아무런 조직 활동도 없는 상태였다. 여운형의 ‘건국동맹’만이 조직 활동을 주장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치 못하다.

 

[해방공간 속의 친일파]

일본 통치의 종식으로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입장이었고 실제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처단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총독부를 계승했으므로 이민족 통치에 협력하던 친일파의 역할이 계속될 수 있었고, 미군정이 총독부보다 통치 능력이 못한 만큼 친일파의 역할은 오히려 더 커졌다. 친일파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세력을 더욱 키워 친일파를 처단할 만한 민족국가가 세워지지 않도록 획책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친일파의 이런 노력을 ‘반공’의 명분으로 정당화해 주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했다.

 

[해방공간 속의 좌익]

조선 좌익의 성장에는 두 갈래의 힘이 뒤얽혀 작용했다. 하나는 식민지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 인식에 기초한 자생적 깨달음이었고, 또 하나는 소련과 코민테른, 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었다. 전자가 범 좌익 형성의 토대였고, 후자는 해방 후 ‘공산당’의 간판을 걸었다.

소련군의 이북 진주에 따라 이북에서는 공산당 중심으로 범 좌익이 북로당을 결성한 반면 이남에서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으로 이북의 공산당-북로당이 실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남로당을 위시한 이남의 좌익 정파들은 이북 지도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해방공간 속의 민족주의자]

친일파-대지주 정당인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짜였고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둘러싸고 가짜와 진짜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해졌다.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1947년 7월 좌측 핵심인물 여운형의 암살을 비롯한 좌우 양측의 견제 속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중간파’로 불린 이 집단은 분단건국의 길로 접어든 1947년 말부터 통일건국을 위한 남북협상 운동을 벌였으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꺾인 중요한 원인 하나가 김구의 노선 혼란에 있었다.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아이콘인 김구가 막판까지 반공극우 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이 힘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1948년 초 그가 돌아설 때는 이미 판세가 결정되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역할]

연합국 중 실세이며 전후 질서의 중심축이 될 두 나라가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의 좌익과 민족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치체제를 최대한 빨리 갖추도록 도와준 반면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의 이민족 지배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차이는 해방된 조선 사회의 추세가 미국보다 소련에 유리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자연스러운 추세에 편승하면 되고 미국은 가로막아야 되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었다.

분단건국에 대한 동기도 미국 측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건국이 되어서는 소련 측에 유리한 결과가 될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련도 통일건국에 집착하지 않고 절반을 확보하는 데 만족했는데, 압도적 경제력을 가진 미국이 핵무기까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찰국가 남조선]

미군의 남조선 지배는 일본 식민통치보다 더 많이 폭력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 자신은 물론 제국주의 일본에서조차 시행하지 않았던 국가경찰 제도를 남조선에 도입하고 파시스트 성향의 인물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군정 3년 동안 남조선 경찰 인원은 일제 말기의 3배 가까이 늘어났고 식민지경찰 출신자들이 그 중핵이 되었다. 경찰은 식민통치의 폭압적 측면을 해방 조선에 증폭 재현하고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는 강력한 조건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1948년의 봄]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기미가 짙어지면서 이북 지도부는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통일건국을 위한 자기네 쪽 준비라고 명분을 걸었지만 통일건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단독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4)를 ‘가능지역 선거’로 변형시켜 실질적 단독건국을 향한 5-10선거가 진행되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성 로비’ 설까지 후세에 남게 되었다.

이북에서는 점령 초기 약간의 인민 저항이 있다가 차츰 사라진 반면 이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제주 4-3사태는 미군정의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