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사회에 엉터리 보수가 너무 많다.

 

한민족은 20세기 전반기 대부분을 자기 국가 없이 지냈고 후반기를 두 개의 국가를 갖고 지냈다. 국가 없던 시절을 식민지시대라 하여 나쁘게 보는 데는 이의가 거의 없다. (뉴라이트 때문에 “거의”란 단어를 넣어야 한다.) 한편 국가가 두 개인 시기를 놓고는 의견이 꽤 갈라져 나오는데, 의견 차이가 정치적 입장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진보는 지금 현실보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내자는 입장이고 보수는 지금 현실의 좋은 점을 지키자는 입장이다. 둘 다 존중받아야 할 입장이다. 지금 한국인에게 현실 국가체제로 주어져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놓고 진보 쪽에서는 바꿀 필요가 있는 나쁜 점을 더 열심히 들춰보고 보수 쪽에서는 지켜야 할 좋은 점을 더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진보 중에 엉터리 진보가 있고 보수 중에 엉터리 보수가 있다. 멀쩡한 현실을 놓고 근거 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이 엉터리 진보다. 유토피아의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혁명의 필요성을 강변하기 위해 인간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까지 제도의 결함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다. 인간의 본성을 벗어나는 이상적 기준에 집착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고생을 시킬 위험이 있는 노선이다.

 

한편 자칭 보수 중에는 소수집단의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를 가로막으려 드는 엉터리 보수가 있다. 필요한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주관이 작용할 여지가 있는 것이므로 필요한 변화의 범위를 작게 보는 엄격한 보수라 해서 꼭 엉터리라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의 필요를 이해관계 때문에 잡아떼는 부류가 문제다. ‘수구꼴통’이라고 불린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내 정치적 입장을 곰곰이 살펴본 결과 5년 전에 내린 결론이고, 지금까지 내내 생각해도 틀림없는 판단이다. 굳이 덧붙인다면 진보적 주장도 진지하게 검토하려고 노력하는 유연한 보수가 되고 싶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엉터리 보수의 힘이 너무 강하다. 건강한 사회에 꼭 필요한 자기반성을 가로막는 엉터리 보수의 힘은 냉전시대에 쌓아놓은 반공주의 보루를 버리기는커녕 아직까지도 보강-확장 공사에 매달려 있다. 대한민국 역사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기만 하면 ‘빨갱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백색테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테러의 주체가 국가이던 상황을 벗어났다는 상황만이 다행이다.

 

엉터리 보수를 대표하는 뉴라이트가 식민지시대 미화와 찬양에 나선 데서 나는 큰 가르침을 얻었다. 식민지 조선과 독립 대한민국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가르침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식민지 역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식민지 역사의 어두운 면이 대한민국 역사에도 많이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와 대한민국시대의 전환점인 해방공간을 치밀하게 들여다볼 생각이 들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 당시 사람들이 겪은 상황을 2010년 8월에서 2013년 8월까지 65년의 시차를 두고 추체험의 작업에 착수해서 이제 마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작업을 통해 무엇보다 ‘해방’과 ‘독립’의 진정한 의미에 생각을 모아 왔다.

 

 

2. ‘해방’의 뜻은 액면대로가 아니었다.

 

‘해방’이란 말에서 나는 나비의 탈바꿈을 떠올린다. 애벌레의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펼쳐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며 나비로서의 존재를 한껏 구현하게 되는 그 계기. 우리 민족의 ‘해방’도 그런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비의 탈바꿈은 내면의 많은 고통과 노력이 쌓여 상황을 바꿀 만한 임계점에 도달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 승리의 한 부산물일 뿐이었고, 조선민족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었고(함석헌), “자다가 떡시루를 받은 격”이었으며(박헌영), 어느 시인은 “일본이 망할 줄 생각도 못해서” 협력했다고(서정주) 한다.

 

연합국 승리로 일본 지배가 끝난 대신 연합국 군대가 조선에 진주해서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과 소련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서 조선 해방과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 진주한다고 했다. 그 착한 말씀이 어디까지 진심이었을까? 감춰진 속셈이 없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합국 승리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선과 악의 싸움, 정의와 불의 사이의 싸움이라는 다각적 세뇌교육을 온 세상 아이들이 수십 년간 받아 왔다. 그러나 연합국과 추축국의 실제 관계는 그렇게 명쾌한 것이 아니었다. 양측 도덕성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국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정말로 도덕적 문제가 그렇게 명쾌한 것이었다면 ‘최후의 승자’ 미국과 소련이 전쟁 발발 후 2년이나 기다려서 자기네가 공격받은 뒤에야 참전했겠는가?

 

굳이 비교한다면 추축국의 범죄성이 더 심했고, 연합국 승리가 인류 전체를 위해 다행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다. 추축국들이 제국주의 후발국으로서 자원 확보에 뒤져 있기 때문에 과격한 정책을 취한 데서 범죄성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연합국이 승리 후 ‘인간성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개념을 서둘러 전범재판에 적용한 것은 이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자기네 승리를 도덕적 승리로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1941년 8월 대서양헌장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도 연합국 사정 때문이었다. 영국은 미국의 참전 설득에 부심하고 있었는데 식민지체제 해체를 지향하는 민족자결주의는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기는 원리였다. 조선 ‘해방’을 규정한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도 대서양헌장의 연장선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의 실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외상회담의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발발 직전 국민투표를 통해 자발적으로 독일에 합병되었다.(영화 Sound of Music에 나오는 것 같은 합병 반대자는 국민투표에서 1%도 안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온 조선과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에는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의 결속력 약화를 위한 전략적 고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모스크바선언에는 “오스트리아인 자신의 독립 노력이 있어야 이 선언이 유효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부대조항까지 붙어 있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은 연합국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로 종전을 맞았다. 김구가 일본 항복을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라고 한탄한 것도 스스로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한 문제를 가리킨 것이다. 승리자인 미군과 소련군이 조선에 진주하며 명목상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돕는다고 했지만, 전쟁 중이건 전쟁 후건 자기네 국익을 조선인의 복리에 앞세우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3. 미국은 조선에서 소련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은 3년 넘게 조선의 남북에 주둔해 있다가 각자에게 의존적인 정부를 세워놓은 뒤에 철수했다. 두 정부는 서로를 ‘괴뢰’라고 비난하다가 전쟁을 치렀고, 전쟁 후에도 오랫동안 냉전의 첨병 노릇을 했다. 미-소 대결을 배경으로 태어난 두 국가는 미-소 대결이 끝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민족이 대결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온갖 비극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당시 조선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분단건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어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을 대신한 외세의 압력이 남북 양쪽에 모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남에서 미국이 일본 역할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에 비하면 이북에서는 조선인의 자치가 발전해 나갔다.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세워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행정의 주체가 되어 토지개혁 등 조선인이 선택하는 정책을 펼쳐나가게 되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총독부를 이어받은 군정청이 3년간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지만 진짜 정부가 못되었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이라는 민정장관부터가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이 선거를 흑백함선거니 뭐니 하면서 흠을 잡는 반공주의 선전과 교육을 우리는 받아왔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기본원칙이 잘 지켜진 선거였다. 반면 같은 때 남한에서 시행된 입법의원 선거는 비교가 안 되는 엉터리 선거였다. 입법의원이 민심을 조금이라도 반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선거로 뽑힌 ‘민선’의원과 같은 수의 ‘관선’의원을 미군 사령관이 임명해야 했다.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나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다른 곳에서(예를 들어 폴란드) 한 짓을 보면 미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조선에서 소련의 태도가 미국보다 좋았던 것은 조선 사정이 소련 쪽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947년 여름 이북을 여행한 미국 언론인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기행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좌익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좌익 정부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돌아가서 자유로이 조직하시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모든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감옥으로 가야 했다. 친일파들이 사라지자 과거의 죄수들은 고향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조선인을 억압한 일본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 정책이었으므로 항일운동의 경제적 성향은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해방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토지개혁 등 넓은 범위의 사회주의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체의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던 조선총독부의 관행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구분 없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선택받을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에서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조선에 세우고 싶어 한 자본주의 체제는 조선의 상황에도 맞지 않고 민족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강행하는 데 많은 비용을(경제원조와 국가폭력) 투입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대표적 비용이 경찰력이다. 미군정은 일제시대보다 갑절 이상의 경찰 인원을 이남 지역에 키워냈고 일제시대 경찰 경력자로 그 주축을 삼았다. 게다가 전국 경찰을 하나의 ‘국가경찰’로 조직함으로써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찰의 횡포 때문에 민심이 더욱 이반하는 악순환의 수렁에 미국은 빠지게 되었다.

 

 

4. 분단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조선의 ‘독립’ 방안을 놓고 두 나라가 취한 입장을 보더라도 미국 쪽 억지가 심했다. 카이로선언 이래 ‘선언’ 차원에 있던 조선 독립 방안을 전쟁이 끝난 후 구체화한 것이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외상회담이었다. 이 회담의 결정 중 크게 문제를 일으킨 것이 ‘신탁통치’ 조항이었다. 조선인의 임시과도정부를 만들어 5년간 또는 그보다 짧은 기간의 연합국 신탁통치를 거친 다음 완전한 독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탁통치에는 세 가지 의미가 들어있었다. 첫째 의미는 국가 운영의 경험 없이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민족에게 연수기간을 두는 셈이다. 국가기구의 작동이나 국제사회의 역할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까지 선진국의 도움과 감독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비록 근대국가 운영 경험은 없더라도 근세까지 민족국가의 오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연수기간이 꼭 필요한지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신탁통치의 또 하나 의미는 전쟁 책임에 대한 가벼운 징벌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치의 압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휘말려들었다는 변명이 공식적으로는 통용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책임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의 감독기간을 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10년의 신탁통치를 거쳐 1955년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다.

 

신탁통치의 마지막 의미는 연합국의 전리품이었다. 전쟁 승리에 공헌하고 전후 세계에서 실력을 가진 나라들이 추축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자기네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으로 보유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 의미가 가장 뚜렷했다.

 

모스크바회담에서 조선에 대해 미국이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데 대해 소련이 반대하여 ‘최고 5년간’으로 절충되었다. 소련은 연합국의 간섭 없이 조선의 진로를 조선인의 결정에 맡겨두더라도 자기네에게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것이다.

 

모스크바결정의 실행은 미-소 두 점령군 사이의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겨졌다. 미소공위는 1946년 봄과 1947년 여름 두 차례 열렸는데, 두 나라 사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견의 초점은 이남의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으로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미소공위 실패의 책임은 어느 쪽이 크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정작 문제는 미소공위 실패에 대한 대응책에서 일어났다. 미국은 조선 문제를 자기가 표결에 유리한 유엔으로 가져갔다.(미국의 압도적 경제 우위가 유엔 표결에 유리했다.) 이것은 강대국의 협조체제로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전통적 방식을 서둘러 포기하고 양 진영이 대결하는 냉전체제를 촉진하는 조치였다.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조선 정부 수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은 유엔 결정을 무시하고 조기 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했다. 해방 직후의 조선 상황도 사회주의가 우세했는데, 그 후 2년 동안 이북에서는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가 계속 진행되어 왔다. 반면 이남에서는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한 극우파가 미군정을 배경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직접 작용을 없앨 경우 이북의 친소세력이 이남의 친미세력보다 우위에 설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에게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주장한 것이다.

 

유엔에서는 미국이 원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국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이남에서 시행되었고, 선출된 제헌의회의 손으로 석 달 후 대한민국정부가 세워졌다. 몇 주일 후 이북에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2년이 안 되어 남북 간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5. 결국은 우리의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미국은 원래부터 소련에게 적대적인 태도가 강했다. 소련 건국 초기에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모두 소련을 적대했지만 192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 소련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었다. 그런데 미국만은 끝까지 소련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한 1933년에야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미국이 유럽국들에 비해 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것이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루즈벨트가 정부를 이끄는 동안은 미국이 소련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45년 4월 루즈벨트가 죽고 곧이어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반공-반소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종전 당시 미국 경제력은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고 군사력도 핵폭탄 독점으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발판으로 미국의 ‘특별한 위상’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냉전체제 구축을 촉진했다.

 

2차 대전의 최대 승자인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 설정은 도처에서 충돌을 일으켰는데 소련은 대체로 방어적 입장이었고, 특히 아시아 방면에서는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켰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승리를 거둘 자생적 공산주의세력조차 지원하지 않았다. 조선에 대해서도 소련은 종전 전의 약속에만 매달린 반면, 미국은 우월한 실력을 근거로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을 압박했다.

 

종전 전 연합국 간의 약속은 조선을 하나의 국가로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먼저 등진 것이 미국이므로 분단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압박에 대한 소련의 대응 방향은 어떻게든 자기 몫을 지키겠다는 것이었으니, 솔로몬 왕에게 맡겼다면 둘 다 조선의 가짜 어머니라고 판결했을 것이다. 손 하나로는 손뼉이 쳐지지 않는다.

 

미국의 책임, 소련의 책임을 따지기 전에 세계와 조선의 상황 속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식민지화의 직접 원인은 일본의 침략이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차 대전 종전 시점에서도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한 근본적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외세의 압력에 대항할 자세를 갖추지 않은 민족에게까지 민족국가 건설을 허용할 만큼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사실은 해방공간에서 조선인들의 온갖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련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의 극좌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추세의 극우가 힘을 장악했다. 민족국가 건설의 원리가 되어야 할 민족주의 정신은 대다수 조선인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미군과 소련군의 존재를 배경으로 하는 극우와 극좌의 힘에 억눌려 현실에 작용하지 못했다. 을사5적보다 더 흉악한 민족반역자들이 이 시대를 횡행했는데도 그들이 지탄받지 않는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과연 한국인은 2010년대의 세계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당당한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식민지로 전락하던 백 년 전에 비해 한국인의 힘은 많이 자라나 있고 세계 사정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져 있다. 그런데도 그 자세가 당당하지 못하다. 민족분단 문제도 제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 내의 갈등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외부세력에게 이용당하는 존재로 남아있고 세계평화에 공헌보다 위협을 더 많이 제공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병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불건강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60여 년 전 이 민족이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때문이었는가? 당시 이 민족의 약점을 드러냈던 인물들이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하는지, 엄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5월말로 잡혀 있는 강연 초고입니다. "해방일기" 작업 끝나면 원고 대량생산은 얼마동안 멈추고 강연 같은 활동에 치중하며 지내야겠다 생각하는 참에 초청이 들어오기에 덥썩 물었죠. 일반인을 위한 강연으로 더 잘하기 위해 생각할 점 짚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