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3. 22:26
 

요양원으로 옮겨 모실 궁리는 지난 3월부터 해온 것이다. 연초부터 식사를 시작하시고 회복이 좋으셔서 3월 되어서는 닥터 한이 이제 병원 아닌 요양원에 가서 지내셔도 아무 문제 없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의료계의 과도한 영리성이 갈수록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의료인들이 모두 닥터 한처럼 환자 위주로 생각하고 얘기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관리 대상인 환자다. 간병인과 간호사들이 아무리 친절을 다한다 해도 생활의 주체가 되시는 데 한계가 있다. 매일 가서 응대해 드려야 하는 필요도 여기에 있다. 어머니다운 생활을 최소한으로라도 확보해 드리기 위해 우리랑 노는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한다. 용태가 좋으실수록 그 필요가 더 크다.

요양원에서는 간병인의 도움을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생활인' 대접을 받으실 수 있다. 텔레비전도 보고, 날씨 좋을 때는 정원에서 햇볕도 바람도 쐬고, 무엇보다, 다른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다. 대등한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 이것이 생활다운 생활을 위해 제일 요긴한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 비용도 매달 40만원 정도 절약되고, 우리가 살펴드려야 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모든 것이 다 좋은데, 의료서비스 수준만이 병원보다 못하다. 방침을 정하고, 괜찮은 시설들도 답사해 놓은 상태에서 석 달 동안 늦춘 것이 그 때문이다. 마침 감기에 한 차례 걸리셨는데, 가벼운 감기 하나로 두어 주일 동안 기력이 푹 떨어지시는 것을 보니 옮기시는 것을 가급적 늦추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더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여름부터 일이 바빠질 것을 예견하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빡빡한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 일산 살림을 지키더라도 당분간 집을 많이 지키지 못하고 지내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계절도 더 늦추기가 아깝다. 정원 좋은 요양원에 가서 햇볕과 바람이라도 즐기는 생활을 내년에 또 누리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지난 금요일, 세 군데 시설을 둘러보려고 길에 나섰다. 안성 죽산의 파라밀요양원은 불교계 시설이고 병원이 같은 구내에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권위주의적 분위기랄까, 노인들을 관리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던 곳. 용인 백암의 백암너싱홈은 좀 작은 규모지만 분위기가 좋아보였다. 두 달 시차를 두고 다시 둘러보아 분위기의 안정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 한 군데는 인터넷 상으로 그럴싸해 보였지만 아직 가본 적이 없던 이천의 세종너싱홈.

세종으로 제일 먼저 갔다. 그리고 다른 두 군데 가보려던 계획은 취소했다. 시설이 훨씬 낫고 운영도 잘하는 것 같아서 바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적성의 진인선원에 못하지 않은 생활여건으로 보였고, 위치가 훨씬 더 좋으니까.

이천 읍내에서 5킬로 가량 떨어진 세종너싱홈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잘 가꿔진 정원 사이로 백여 미터 올라가니 건물 앞 비치파라솔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영감님이 맞이해 준다. 인상 좋은 영감님과 몇 마디 기분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원장님이 식사를 마치고 내려와 인사를 하는데, 알고 보니 영감님이 이사장이었다. 요양원 세우기 전에는 장애인 시설을 이곳에서 꾸렸다 하고, 이사장님은 내내 정원을 가꿔 왔다는 것. 지금도 정원 일을 계속하고 계시단다.

간호사인 원장님도 꽤 연만해 보이시고(내 연배쯤?) 언행이 침착한 분인데, 가족이 없으신지 원내에서 생활하신다고 하여 더욱 마음 든든하다. 이사장님도 정원 속의 아담한 집에서 사시고.

다른 요양원보다 한 달에 15만원 정도 비싸지만 시설만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지금 상태의 어머니로서 자연을 즐기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보인다. 수안보의 작은형이 쉽게 찾아올 수 있고, 내가 부산 쪽에 가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 달에 한 번 차 몰고 다니러 올 때 오는 길 가는 길에 들르기도 쉬운 편이다. 일산에서 지낼 때는 차로 두 시간 가량이니 주 1회 다니기가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어머니께는 옮길 계획을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일요일에 간병인 여사님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월요일엔 닥터 한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알려야 할 텐데, 어머니를 가장 가까이서 살펴드리던 분들이 나중에 알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오는 길에 강 여사에게 얘기하니 어머니께 쪼르르 쫓아가서 "할~머~니~ 할머니 가시면 우리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요?" 재롱을 떤다.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몇 마디 대꾸하시다가 기본 개념이 파악되신 듯, 나를 처다보고 말씀하신다. "난 여기가 좋다. 다른 데 안 갈란다." 그러자 여사님들이 번갈아 나서서 아드님이 매우 좋은 곳을 찾아서 모시려는 것이니, 우리는 서운하더라도 할머니는 가셔야 한다, 우리도 시간 나면 찾아 뵙겠다, 하고 달래 드리니까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월요일 오후에 다시 가 뵈니, 그 사이에 여사님들과 몇 차례 이야기가 있었던 듯하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정색을 하고 말씀하신다. "기협아, 나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니? 난 여기가 좋은데." 서두를 일이 아니다. "어머니, 여기가 편안하시다니까 제 마음도 기쁩니다. 여기 그냥 계시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그쪽은 제가 보기에 여기보다도 더 좋던데요? 조금 있다가 기목이 올 테니까 기목이 생각도 한 번 들어보세요."

세 시에 온다던 형은 다섯시 반이 되어서야 나타났지만, 어머니 얼러드리는 솜씨는 확실히 나보다 윗길이다. 형이 다녀가고서는 옮기는 것이 어머니 마음에도 당연한 일이 된 것 같다.

오늘도 두시 반쯤 가 뵈니 기분이 괜찮으시다. 엑스선 사진 찍으러 휠체어로 다녀오시는데, 힘든 기색이 전혀 없으시다. 병원에선 휠체어 타시는 것도 목욕하실 때 외엔 없었는데, 요양원에선 가급적 침대에 누워서보다 휠체어에 앉아서 많이 지내시게 해드린다니 그것만 해도 무척 좋아하실 것 같다. 병원에 정원만 있더라도 휠체어에 앉혀 바람 쏘이시게 해드릴텐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 못하는 옥상정원 외에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뿐이니 여사님들께 휠체어 앉혀 드려 달라고 수고를 청할 멋도 없었다.

결단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한 것을 넘어 오는 금요일 이후 어머니 생활을 생각만 해도 기쁘다. 병원급 의료서비스가 현장에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저주저 해왔는데, 지난 번 감기 정도 대응에는 아무 문제 없겠고, 이천의료원이 10분도 안 걸리는 위치에 있으니 더 큰 필요가 있더라도 큰 걱정은 없겠다.

 

 

세종너싱홈 원장 성기순

467-832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우곡리 374-11

전화 031-6343-119   팩스 634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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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