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3. 22:15

며칠 전 큰형 편지에선 전화로 듣는 어머니 목소리가 약해지신 것 같다고 했다. 큰아들인 줄 알아듣기는 하시는데, 그 이상 대화가 많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일기를 얼마동안 소홀히 하면서 형을 좀 지나치게 걱정시킨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노 대통령 생각에 참 많이 몰입해서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가신 분에게 큰 숙제를 받은 느낌이다. 그래도 이제 시간을 두고 그 숙제를 풀어나갈 자세가 안정되어 간다.

노 대통령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린 것은 영결식 며칠 후였다. 다른 날보다도 정신이 맑아 보이셨고, 늘 하는 대로 쓰셨던 글 한 꼭지를 읽어드렸더니 거기서 연상이 이어지는 대로 6-25 시절을 기억하는 말씀을 꽤 길게 하셨다. 그래서 이 정도 정신이시면 무슨 일인지 이해하실 것 같아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 노무현 씨 아시죠?"

"노무현? 대통령 말이냐?"

"네, 어머니. 그 사람이 며칠 전에 죽었어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아득한 표정으로 넘어가신다. 뭘 더 묻지도 않으신다. 그리고 잠시후 눈물을 주루룩 흘리신다. 한참 아득한 표정으로 말없이 계시다가 가볍게 고개를 한 차례 흔들고 눈길을 내게 돌리면서 다른 얘기를 꺼내신다. 조금 전의 얘기는 잊어버리신 것처럼.

텔레비전도 없는 방이고, 간병인 여사님들은 한국 정치에 관심없는 중국인들이니 소식을 그 때까지 전혀 못 듣고 계셨기가 쉬운데, 내가 드린 말씀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리신 것인지. 노 대통령 취임할 무렵에는 벌써 기억력 감퇴가 꽤 심각하실 때였는데. 모시고 앉았을 때 텔레비전에 노 씨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저 사람 생긴 게 참 기분좋게 생겼어."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봄감기에서 완전히 회복되신 지는 보름쯤 된다. 그런데 행동양식이 그 전과 상당히 달라지셨다. 외향적인 편에서 내향적인 편으로 바뀐 점이 제일 두드러진다. 조그만 자극이 있어도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표현을 많이 하려 애쓰시던 것이, 지금은 미니멀리즘으로 취항이 바뀌셨다. 전화로 반응을 살피는 큰형이 보기엔 어머니가 많이 위축되어 계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내 상태에 영향을 받으신 걸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면도 있을 수 있겠다. 요즘은 오래 앉아 있기 힘들 때가 있어서 식사 때를 피해서 많이 간다. 가서 놀아드리는 건 노래, 어머니 글 낭독, 불경, 이렇게 틀이 잡혀 있다. 틀이 너무 잡혀 있어서 변화가 적다는 사실 자체가 내 기분을 어머니께 전해드린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게 생각되는 상태는 아니시다. 음식도 잘 드신다. 다만, 전처럼 "더, 더, 더!"를 시종일관 외치는 대신 권해 드리는데도 "더 먹어도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아무리 맛있어도 지나치게 먹는 일은 피해야지." 하는 식으로 먹물 티를 내실 때가 많다. 특히 나를 대하시는 태도가 정중하시달까? 어린애가 어버이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앞뒤 안 가리고 대하시던 분이, 요즘은 체면 차리는 기색이 많으시다. 매우 진지한 말투로 "고맙다." 불쑥 말씀하셔서 "뭐가 그리 고마우세요, 어머니?" 하면 "모든 게 고맙다." 하시든지 "이렇게 매일 와주는 게 고맙다." 하는 식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당신 자신을 하나의 객체처럼 바라보는 일이 익숙해지시는 것 같다. 연초의 회복 때는 그 이전에 대한 기억이 아주 미약해서 갓난아이 같은 마음 상태셨다가, 그 이후의 생활 경험도 쌓이고 과거의 기억도 차츰 더 확충되시는 데 따라 일어나는 변화일 것 같다.

단 하나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때때로 보이시는 조울증 비슷한 현상. 며칠 전 아내가 혼자 가 모시고 있다가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편안하게 응대해 드리고 있었는데, 제자인 줄 생각하고 계시던 이 여자가 며느리란 사실이 밝혀지자 거의 광적인 적대감을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표현하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엊그제는 저녁식사가 한참 지난 시간에 내가 들어가니 누워서 입술을 달싹달싹 혼잣말을 하고 계시는데, 나를 힐끗 보고도 한참을 계속하시기에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했더니 갑자기 목청껏 "나니모 나라나캇다." 외치시는 것이었다. 내가 놀라서 "아무것도 안 되었다고요? 뭐가요, 어머니?" 하니까 목소리는 좀 낮추면서 같은 말을 똑같이 몇번이고 되풀이하시는 것이었다. 한참 그러다가 내가 말을 섞어드리려고 애를 쓰다 보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는 했는데, 그 말씀의 뜻보다도, 왜 그렇게 소리치고 반복하셔야 했는지, 그 강박이 무엇인지가 궁금한데, 짐작 가는 것이 없다. 그렇게 답답해 하실 때가 종종 있는지 여사님들에게 물어보니 목욕이나 기저귀갈이 등 몸에 손을 댈 때 욕을 많이 하시지만, 크게 신경 쓰일 만큼 특별한 정도는 아니시라고 한다.

그렇게 참을성 없는 행동을 때때로 보이시면서 스스로 '참을성'에 대한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다. 어제는 들어가 모시고 앉자 마자 난 데 없이 "너는 참 참을성이 있구나." 하시기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고 "네, 어머니. 제가 참을성이 좀 있죠. 근데 참을성 밖에 다른 게 없어서 탈이예요." 능청을 떠니까 피식! 웃고는 "네가 참을성이 있어서 참 고맙다. 우리 집 사람들한텐 그게 없어." 하신다. "왜요, 어머니. 영이 보세요. 영이가 얼마나 참을성 많아요?" 하니까 풋! 웃고는 대꾸도 않으신다. 그래서 이번엔 큰형을 들고 나와 봤다. "기봉인 어때요? 그만하면 참을성 많지 않아요?" 하니까 그건 그럴싸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이 찔러 봤다. "어머니, 기봉이랑 나랑은 어머니를 안 닮아서 참을성이 있는 거 아닐까요?" 했더니 바로 낚이신다. "그렇지, 나 닮았으면 참을성이 없어야지. 느이들은 누굴 닮아서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거냐?" 정통으로 한 방 넣어봤다. "어머니, 기봉이랑 나랑은 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데 반응이 뜻밖이었다. 정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 아버지가 누구지?" 내가 더 어리둥절해져서 "어머니 남편 말씀예요. '김서방'이라고 계셨잖아요?" 그래도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는 듯이 잠깐 어리둥절한 채로 계시다가 다른 데로 이야기를 돌리셨다.

이건 정말 생각밖이다. 어머니 인생을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강하게 묶어놓아 온 그분 생각에서 이렇게 깨끗이 벗어나실 수 있다니. 금년 들어 기운과 정신을 되찾으신 후 전반적으로 마음이 편안하신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이만큼씩이나 그 오랜 상처의 통증에서 벗어나실 수 있다니. 기간이 얼마가 되든 이제 누리고 계시는 여생은 작년까지 허우적거려 오신 고해에서는 크게 벗어난 인생이 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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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