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협아! 네가 오니까 참 좋구나."
얼굴을 보자마자 싱글벙글이시다. 오늘은 모시고 앉았기가 꽤 편하겠다.
"네, 어머니. 어머니야 제가 곁에 있건 없건 늘 행복하시잖아요?"
"그야 그렇지. 허지만 네가 있으면 더 좋은 걸?"
"그러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기쁩니다. 아부도 참 잘하시네요."
"아부? 아부? 아부야 네가 잘하지."
기분 좋은 표시를 하느라고 눈까지 쫑긋쫑긋 하시다가 급기야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치신다. 얼굴을 대 드리니 두 손으로 만지다가 손을 멈추고 한 마디. "너 어째 이렇게 이쁘냐?"
이렇게 흥이 나셨을 때는 최대한 재미있게 끌고 가야 오래 즐기실 수 있다. "아니, 어머니! 이 얼굴이 이쁘다구요? 아부가 너무 심하신 거 같아요."
"아니야, 진짜로 이뻐!"
분위기를 한 차례 묵직하게 잡아드린다. "어머니, 어머니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시니까 이 아들까지 이쁘게 보이시는 거 아닐까요?"
묵직한 분위기로 따라오신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래, 내 마음이 편하니까 네가 이뻐 보이고 고마운 마음도 드는 거겠지."
시간이 세 시였다. 점심과 저녁 식사의 딱 중간. 과자를 드리기 적당한 시간 같아서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어머니, 어머니께 글도 읽어드리고 싶고 과자도 드리고 싶은데, 어느 쪽을 먼저 할가요?"
'과자' 소리에 모드가 확 바뀌셨다. "야, 뭐 먹을 거 없니? 배가 고파 죽겠다."
서랍을 열어 보니 드시던 홈런바와 웨하스가 반 봉지 가량씩 남아 있었다. 한 차례에 다 드리기엔 좀 많아 보였다. 그런데 드린 것을 입에 넣으시자마자 더 달라고 손을 휘저으시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만하면 충분하시겠지 하고 홈런바를 몇 알 남긴 채 서랍을 닫았더니 아직 입을 우물거리시면서 손만 휘저으시는 게 아니라 눈알까지 굴리며 몹시 별르는 기색이시다. 꿀떡! 삼키시자마자 예상대로 호통 모드다. "더 줘!!!" 얼른 응하지 않으니까 표현이 자꾸 거세지신다. "더 달란 말이야!!!" "먹을 거 내놔!!!" 복도에서 간호사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맹렬한 호통이었다.
두유를 입에 대 드리며 얼러드렸다. "어머니, 그만큼 잡수신 것도 대단히 훌륭하신 일이예요. 더 드시지 않아도 저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두유를 삼키신 다음에는 구걸 모드로 돌아와 계셨다. "기협아, 내가 점심을 못 먹었어. 너무너무 배가 고파." 표정도 말씨도 그렇게 애절하실 수가 없다.
곁을 지나가던 채 여사가 이 말을 듣고 발길을 멈췄다. "할머니, 그렇게 잘 잡숫고 못 먹었다 그러시면 저희는 뭐가 돼요?"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오늘은 좀 유별나세요. 아까는 아침도 안 드셨다고 잡아떼시더니."
채 여사가 내게 말하고 있는 동안 벌써 어머니의 호통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야! 내 점심 내가 못 먹었다는데 네가 뭘 아는 척하냐!"
채 여사가 킥킥거리며 물러간 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여쭸다. "어머니, 정말로 점심을 못 드셨어요?"
"못 먹었어! 넌 네 에미 말도 못 믿냐?"
"어머니, 아침도 못 드셨어요?"
호통기가 완연히 누그러지신다. "아침? 아침이야 먹었겠지, 뭐."
"어머니, 여태 점심을 못 드셨으면 많이 시장하시겠어요. 여기 과자가 여섯 알 있는데 어머니 다 드세요." 하며 한 알을 손에 집으니까 입을 짝 벌리신다. 통제가 효과적으로 되려면 공세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어머니, 점잖지 못하게 입으로 받으시려 하세요? 손으로 받으세요."
손을 내밀어 받아들면서 뭔가 불평하고 싶은 기분이신가보다. "야, 째째하게 한 개씩 주냐? 이런 건 한 번에 두 개씩 주는 거야."
"네, 어머니. 어머니는 역시 위대하십니다." '위대'하다는 건 어렸을 때 형제간에 '밥통 큰' 놈이라고 놀릴 때 쓰던 말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다.
"그래, 나는 위가 대하다. 그래서!"
두 개씩 두 개씩 해서 다 드렸는데도 탐욕스러운 눈길을 거두시지 않는다. 빈 곽을 뒤집어 보이며 달래드리고 있는데 성격이 쾌활한 강 여사가 지나다가 한 마디 잘못 건드렸다. "할머니, 점심도 제가 얼마나 많이 먹여 드렸는데, 그 과자를 다 드시고 또 달라 그러세요?"
대뜸 '년'자가 쏟아져나온다. 옮겨 적을 만큼 조리 있는 얘기도 아니고 향기로운 얘기도 아니다. 강 여사가 "할머니, 잘못했어요." 하고 깔깔대며 달아난 후 나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데, 3초 안에 새 봉투를 따서 과자를 쥐어 드리지 못했으니 그 다음 말씀은 내가 들어 싼 말씀이다. "이 쌍놈아! 먹을 거 줘!"
여사님들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쌍년"은 입에 달고 계시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변형해서 내게 적용시키시는 건 모처럼의 일이다. 잘 않던 짓을 하셨으니 분위기 전환을 위해 좋은 빌미다.
"어머니, 지금 제게 '쌍놈'이라고 하셨어요?" 정중히 묻는다.
"그랬다, 이 쌍놈아!" 조금 어리둥절하신 듯, 욕에서 독기가 빠져 있다.
"어머니, 제가 쌍놈이면 쌍놈 어머니인 어머니는 뭐가 되세요?"
"쌍놈 어머니면 그야... 쌍년이지, 뭐." 그 말씀이 스스로 생각해도 재미있으신 듯, 누그러진 기분으로 "쌍놈"과 "쌍년"이 든 말을 만들어 이러저리 경쾌하게 해 보신다. 그 동안 웨하스 한 봉지를 새로 따서 한 개 잡숫고 있는데 주 여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주 여사는 11월부터 2월까지 이 방에서 일했으니 어머니의 초기 회복 과정을 살펴봐 준 분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일에 열심이면서도 처신이 반듯하고 조심성도 있어서 겪어본 여사님들 중 자유로병원의 조 여사와 함께 가장 믿음직한 분이다. 한 달쯤 다니러 간다고 고향 갔다가 여태 안 와서, 그런 분 말씀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건가, 의아해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돌아와 다른 층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틈날 때마다 어머니께 들러 뵙는데, 나랑은 오늘에야 마주친 것이다. 잠깐 어머니를 상대해 드리는데, 역시 아주 능란하고 편안하다. 어머니도 뚜렷이 기억은 못하시지만 믿을 만한 상대라는 정도 기억은 어렴풋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의식이 아주 미약하실 때부터 의지하셨던 상대니까.
주 여사가 상대해 드리는 동안 멋을 것에 대한 집착도 풀어지셨다. 쥐어 드린 과자를 주 여사 먹으라고 권하신다. 주 여사가 사양하다가 절반을 잘라 먹으니 흐뭇한 표정으로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으신다. 주 여사가 간 뒤 또 한 쪽을 드리니까 내게 권하신다. 절반으로 잘라 드리니 반쪽을 드시고는 먹을 것 타령이 끝나셨다.
노래 네 곡을 함께 불렀는데, 갈수록 가닥이 잘 잡히신다. <섬아기> 2절을 부르는 동안 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길을 그리 돌리고도 가사를 외워 계속 부르신다.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시다. 반야심경을 함께 외운 다음 금강경은 내가 읽어 드리는데, 들으시는 표정을 보니 내용이 대개 기억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수필은 <지구는 하나 (1)>를 읽어드렸는데, 당신이 쓰신 글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 정도 복잡한 얘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시는 걸 보면 기억에는 깔려있으신 건데.
한 시간 반이면 좀 길게 모시고 앉았던 편이다. 요즘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앉았다가 일어날 때 별로 힘드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칭얼 모드를 보여주신다. "기~협~아~ 네가 가면 난 어떡하니?" 눈썹을 찌푸리고 목소리도 간드러지게 맞추셨지만, 절박감이 별로 없다. 나 이런 모드도 보여줄 수 있어, 하고 재미로 해보시는 것 같다.
"어~머~니~ 떠나가는 제 마음도 아파요~"하고 일단 호응해 드린 다음 차분한 진압작전이다. 반박하실 수 없는 그럴싸한 말씀을 길게 늘어놓아 칭얼 모드가 풀릴 시간을 버는 것이다. "어머니, 제가 곁에 있으면 어머니가 더 기쁘시다니까 어머니 곁에 늘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일도 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어머니가 제가 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행복하시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위안이예요. 혼자 앉아 일하다가도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면, 아, 지금 아들이 곁에 없어도 어머니는 행복하고 편안하게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놓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예요. 어머니,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제가 곁에 없으면 좀 심심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일하고 있으면서도 어머니께 고맙다는 생각 하고 있는 줄 아시고 편안히 계세요." 이 정도 쏟아부으면 에구, 잘못 건드렸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럼 뽀뽀나 하고 가려무나." 하고 뺨을 내미신다. 오늘도 그렇게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