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이 접하는 언어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근대언어학이 발전했고, 비교언어학이 그 중요한 분야로 나타났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럽 언어들과 비슷한 특성이 많이 발견된 사실이 제일 먼저 관심을 끌었다. 이 방향 연구가 쌓여 19세기 초에 어족(語族, language family)’ 개념이 세워졌다.

 

인도-유럽어족을 필두로 여러 어족의 존재가 확인되고 체계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중 매우 특이한 어족 하나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남양어족)이었다. 분포 영역이 가장 넓었다. 인도양과 태평양 대부분을 포괄하는 이 영역의 동쪽 끝 이스터섬(서경 109)과 서쪽 끝 마다가스카르(동경 47) 사이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절반이 넘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languages#/media/File:Austroneske_jazyky.jpg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의 분포 지역. 그 사용 인구는 4억 명 가까이 된다.

 

진화론이 유행하던 19세기 유럽에서 넓은 분포는 강한 힘의 증거였다. 인도-유럽어족은 인도, 페르시아, 유럽 등 구성원의 면면이 이 통념에 부합했다. 그런데 남양어족은? 남양인은 그 시대의 열패자(劣敗者)’였다. 정치-군사적으로뿐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침략을 당하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종교조차 볼 만한 것은 모두 외래종교였다.

 

남양어 사용권을 하나의 독자적 문명권으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명세력이라면 지금 당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내세울 만한 경력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남양인은 문자기록조차 변변찮은, 따라서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양어 팽창의 진원지는 타이완

 

유럽 발 근대문명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지면서 문명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근대적 상황에 대한 적응력만을 기준으로 문명의 자격을 따질 때는 유럽 기독교문명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오래된 문명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상대주의 관점이 일반적이다.

 

그래도 문명의 자격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유지되고 있다. 독자적 역사서술을 갖지 못하고 수백 년간 모든 면에서 정복과 침략의 대상으로 지낸 남양인의 세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본다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양문명의 존재를 잘라 부정할 근거도 찾기 어렵다. 그 넓은 언어 전파가 문명의 힘 없이 가능했겠는가? 넓은 영역에서 긴 기간에 걸쳐 특정 계열 언어의 사용 범위를 확장한 어떤 힘이 있었다면 그 힘이 곧 문명의 힘아니겠는가.

 

남양어 팽창(Austronesian Expansion)’은 남양어 사용권 확장의 속도가 특별히 빨랐던 현상이다. 기원전 1500-1000년경에 타이완에서 출발해 동남아 일대에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남양어 사용자의 절대다수가 동남아 일대에 살고 있다.

 

타이완을 남양어 팽창의 출발점으로 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타이완 원주민 언어에 팽창기 이후의 문명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 남양어에 나타나는 비교적 늦게 발생한 개념들(도구, 작물, 가축의 이름 등)이 타이완 언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또 하나 이유는 어족 분화 첫 단계의 흔적이 타이완에서만 확인된다는 데 있다. 남양어족의 제1차 하위분류를 몇 갈래로 할지는 아직도 이설이 분분하지만, 타이완 밖의 모든 남양어가 하나의 갈래(Malayo-Polynesian)에 속하고 다른 갈래들은 모두 타이완 안에만 존재한다는 시각에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한다. 타이완에서 제1차 분화가 일어난 다음 그중 한 갈래가 외부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시각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languages#/media/File:Formosan_languages_en.svg 타이완 원주민 언어의 분포. 남양 일대에 널리 퍼져나간 말레이-폴리네시아어는 작은 부속도서 한 곳에만 남아있다.

 

 

아열대 도서지역에 적합한 생활양식

 

남양어 팽창기의 상황에 생각을 모아본다. 신석기문명의 확산으로 농업의 발전이 빠르던 시기였다. 농업이 약하던 해양세력 남양인이 농업 발전의 주체인 대륙세력에게 밀려나는 그림이 얼른 떠오른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그림이 아닌 것 같다.

 

남양인에게도 농업이 있었고 그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농업에서 나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여러 섬으로 가져갔고, 거기서 얻은 생산력이 먼저 자리 잡고 살던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는 힘이 되었다.

 

다만 남양인의 농업과 대륙세력의 농업 사이에 성격 차이가 있었다. 대륙세력은 수리-관개를 통한 집약농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해안과 도서 지역 자연조건은 이에 적합지 않았다. 남양인은 집약도 낮은 농업과 어로-채집의 병행으로 주어진 자연조건에 적합한 생활양식을 키워냈고, 그 생산력이 어로-채집에만 의존하던 도서 지역 원주민보다는 우월했다. 그래서 대륙에서 밀려나며 해양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sh-and-burn#/media/File:An_example_of_slash_and_burn_agriculture_practice_Thailand.jpg 타일랜드 치앙마이 부근의 화전(火田). 집약화 이전 초기 농업의 전형적 형태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Fishing#/media/File:Fishing_tools_stone_age_SPMZ.jpg 낚시와 작살이 신석기시대 고기잡이의 대표적 도구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Fishing#/media/File:Fishing_Woman.jpg 아쌈 지역의 전통적인 고기잡이 대나무 체. 선사시대부터 쓰였음직한 재료와 형태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며 또 하나 수수께끼의 해답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동서로 멀리까지 퍼져나가면서 왜 가까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수수께끼다. 뉴질랜드에는 꽤 늦게(1250년경) 들어갔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정착한 흔적이 없다.

 

남양인이 도서 지역에 전파한 농작물은 벼와 구근류 등 열대-아열대 작물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농업에 적합한 동남부)와 뉴질랜드는 온대 지역이다. 어쩌다 그런 곳에 발길이 닿아도 열대 지역에서 가져간 작물의 경작으로 원주민보다 유리한 조건을 누릴 수 없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 , Guns, Germs, and Steel>(1997)에서 농업문명 전파가 남북 방향보다 기후조건이 비슷한 동서 방향으로 진행되는 원리를 밝혔다.

 

그리고 남양인의 큰 강점이 항해능력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이나 큰 섬)보다 작은 섬에서 큰 상대적 이득을 누렸을 것이다. (뉴기니섬에도 남양인의 정착이 적었다.) 통나무배나 뗏목으로 가까운 곳을 겨우 건너다니던 신석기시대에 남양인은 돛과 아웃리거(outrigger)를 장착한 배로 큰 바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각(船殼)의 판자를 못을 쓰지 않고 밧줄로 묶어 엮는 독특한 조선술은 금속기가 보급되기 전에 개발된 기술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Outrigger#/media/File:COLLECTIE_TROPENMUSEUM_Reli%C3%ABf_op_de_Borobudur_TMnr_20025669.jpg 자바섬 보로부두르 사원에 부조로 새겨진 아웃리거 장착 선박

https://en.wikipedia.org/wiki/Crab_claw_sail#/media/File:Atlas_pittoresque_pl_096.jpg 피지섬의 배 그림(1846). 게집개돛(crab-claw sail)은 단순한 구조로 높은 효용성을 제공한 남양인의 뛰어난 발명품이었다.

 

 

남중국도 동남아의 일부였을까?

 

열대-아열대 지역의 섬들. 농업 발전이 빠르던 온대 지역에서 밀려난 남양인을 위한 최적의 틈새였다. 집약농업의 발전이 아직 아열대 지역에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주어진 이 틈새는 대륙세력의 계속된 농업기술과 정치조직 발전에 따라 꾸준히 줄어들었다.

 

동남아의 남양어 사용이 해양부(Insular Southeast Asia, 말레이반도 포함)에 집중해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어느 시기에는 대륙부(Mainland Southeast Asia)에도 널리 분포해 있다가 대륙 농업문명의 압력 증대에 밀려난 것이다.

 

동남아 대륙부와 기후와 지형 등 자연조건이 비슷한 중국 남해안 일대의 상황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이 지역에도 어느 시기에 남양인이 살고 있다가 한화(漢化)의 긴 역사를 통해 그 흔적이 지워진 것은 아닐까? 해협 양쪽에 살던 남양인 집단 중 한쪽은 사라지고 한쪽만 남은 것이 타이완 원주민 아닐까?

 

최근 량저(良渚)문화 유적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량저문화는 기원전 3400-2250년 기간에 장강(長江) 하구 일대에 분포했던 신석기문화로 1936년 발견된 량저 유적을 비롯해 수십 개 유적이 발굴되었다. 성곽 형태와 부장품의 내용 등을 근거로 중국에서 국가 형태의 완성에 가장 앞섰던 신석기시대 문화로 주목받아 왔다.

https://en.wikipedia.org/wiki/Liangzhu_culture#/media/File:Model_of_Liangzhu_Ancient_City_01_2013-10.JPG 량저 유적(성곽 포함)의 모형

https://en.wikipedia.org/wiki/Liangzhu_culture#/media/File:Neolithic_pottery_dou,_Liangzhu_Culture,_Zhejiang,_1955.jpg 량저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

 

장강 유역 여러 유적에서 채취된 인간 유전자 분석 연구가 2007년 시작되었다. 량저문화 유적의 시료에서 “Haplogroup O1-M119” 유형 Y-염색체 빈도가 높게 나타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 유형 염색체의 존재는 동남아의 남양인 및 크라-다이(Kra-Dai)인과 가까운 혈연관계를 시사한다.

 

관련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서 머잖아 더 많은 연구결과가 기대되는데, 남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가 많이 밝혀질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남중국 고대사에서(어쩌면 중세사까지) 중국사보다 남양사의 맥락으로 읽을 측면을 많이 찾게 될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6790

 

Posted by 문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21816480282579 

 

이 책은 연구서이면서 또한 교양서다. 저자는 연구서를 목적으로 집필한 것인데 독자 대다수는 교양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구서는 독자의 연구활동에 활용되는 생산재’, 교양서는 독자의 만족을 위한 소비재성격을 가진다.)

 

연구서가 교양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세계적 추세를 디지털혁명이 더욱 촉진하고 있다. 연구논문과 연구서 등 연구문헌은 지면 인쇄보다 디지털 형태로 옮겨가고 있다. 적은 비용으로 수요자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되고, 번역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라 다른 언어권 연구자들의l 이용이 쉽게 되어가고 있다. (사전류와 연구자료가 디지털 형태로 넘어가는 뒤를 연구문헌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책의 공간은 교양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현대사는 현실과의 관련성으로 일반인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에 연구서라 해도 교양서로 받아들이기 쉽다. 정 교수는 이 수요에 잘 부응해 온 연구자인데 나는 그가 교양서 측면을 더 중시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교양서로서 <1945년 해방 직후사>에 관한 의견을 내놓는다.

 

 

1. 맥락을 중시할 필요

 

교양서는 연구서에 비해 맥락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패전 직후 몇 달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이 이 책의 주제인데, 내부 진행만이 아니라 국제적 맥락을 살피는 것이 주제의 이해를 위해 불가결한 작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이 측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커밍스의 1986년 책 하나만이 보인다.

 

넓은 범위의 맥락을 살피는 일은 기존 연구의 검토를 통해 이뤄진다. 사료를 직접 검토해야 연구의 자격이 있다는 학계 통념을 현대사 연구자들은 앞장서서 벗어나야 한다. ‘현대라는 시대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넓은 연관관계 위에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사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보기에 연관관계의 제시가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 몇 가지를 예시한다.

 

 

카이로선언의 의미

 

조선의 전후 독립에 대한 국제적 합의의 증거로 카이로선언이 이 책에서도 제시된다. 그러나 그 합의가 얼마나 탄탄한 것이었는지, 이 선언의 증거가치가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 선언에만 의지해서는 아전인수의 굴레에 묶일 위험이 있다.

 

194311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 자세를 가다듬기 위한 목적으로, 유럽 방면 작전을 논한 직후의 테헤란회담과 별도로 아시아 방면 작전을 논한 회담이었다. 작전회의 성격의 회담에서 나온 선언인 만큼 국제법적 구속력이 약했다.

 

카이로회담 직전의 4개 모스크바선언 중 오스트리아선언을 카이로의 한국 관계 선언 내용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선언은 각각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해체에 목적을 둔 것인데, 오스트리아선언에는 오스트리아 독립을 명시하면서도 조건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 독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되며, 최종적 (전후) 처리에는 자신의 해방에 대한 자신의 공헌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독일에 저항하고 연합국에 협력해야 독립을 쉽게 해준다는 노골적 협박이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에도 같은 조건이 암묵적으로 붙어 있었다고 봐야겠다. (특히 “in due course”란 대목에) 오스트리아는 결국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

 

 

미국의 국제주의와 국가주의

 

미국은 “American exceptionalism”, “America first” 등으로 표현되는 국가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윌슨과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는 세계대전이라는 비상상태 아래서만 현실정치에 제기될 수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윌슨이 제창한 국제연맹을 외면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국가주의 회귀는 루스벨트의 부재 때문에 더 급격했다. 그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이다.

 

루스벨트의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번즈는 갑자기 대통령이 된 트루먼에게 전폭적 신임을 받고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전후 처리에 앞장섰다.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번즈였다고 한다.) 트루먼은 몇 달 후부터 번즈의 노선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나 번즈는 1947년 초까지 국무부를 지켰고, ‘트루먼 독트린은 번즈의 사임 직후에 나왔다. 매카시즘 소동이 국무부를 첫 번째 과녁으로 삼은 사실도 이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번즈의 국무부가 루스벨트 사후 2년 가까이 국제주의의 보루로 남아있는 동안 국방부는 국가주의의 흐름을 탔다. 종전 후 당연한 국방예산과 병력의 감소를 억제하려는 일부 군인들의 의지가 국가주의 회귀의 동력이 되었고, 그 대표적 인물이 맥아더였다. 군정사령관 하지가 이승만을 극진히 대한 것도 신탁통치안 번복에 올인한 것도 군 편제상 직속 상관인 맥아더와의 관계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할 일이다.

 

 

소련, 중국, 일본의 상황

 

주변 여러 나라의 상황에도 이 책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파악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일본의 경우, 옥쇄의 각오만으로 종전을 맞았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관점이다. 총독부도 비밀리에 정보를 획득하고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무능-무책임이다.

 

저자는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증언에 입각한 모리타의 1964년 책 내용 중 “815일 시점에서 한반도 분단을 일본 내무성과 총독부가 인지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76) 단언하는데, 의문이 남는다. 분단점령 방침이 공식적으로 확정되기 전이라도 항복 조건의 비밀교섭 과정에서 거론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항복 당시에는 말할 수 없던 것을 전범재판과 미군정이 끝난 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중국은 미--소와 함께 연합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전쟁에 대한 공헌은 작았다. 게다가 장개석 정권은 다른 연합국의 심한 불신을 받았다.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충칭을 떠난 후 상하이에서 몇 주일 지체한 것은 장개석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인접한 연합국 중국이 한국 문제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이 김구와 임정계 몰락의 배경이 되었다. 장개석의 중국이 처해 있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 본토에 대해서도 지분을 (최소한 홋카이도라도) 요구할 것으로 미국 관계자들이 예상했던 소련이 38선을 받아들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8-15 당시에 이미 조선 진주를 시작하고 있었던 소련이 북조선 점령으로 만족한 것은 엄청난 양보였다. 얼마 후 소련은 전략적 가치가 큰 이란에서도 쉽게 물러났고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혁명에도 냉담했다. 동유럽에 대한 스탈린의 병적인 집착을 빼고는 당시 소련의 아시아 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

 

 

2. ‘실증추론의 영역

 

역사 연구에는 실증이 중시된다. 그런데 실증의 ()’에는 실제(實際)’충실(充實)’의 두 가지 뜻이 엇갈린다. “있는 그대로의 뜻도 되고 의미가 깊은의 뜻도 되는 것이다. 랑케의 표어로 통하는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의 해석에도 “eigentlich”실제로로 해석하는 통설에 반대해 본질적으로로 이해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실증의 의미가 무엇이든, “실증되지 않은 사실은 배척한다는 식의 배타적 실증주의에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실증이 이뤄지는 데는 일정한 현실적-기술적 조건이 필요하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선별한다면 현재의 권력이 과거의 실상을 왜곡시키는 길이 열린다.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추론의 역할이 있다.

 

왜곡의 의도가 없더라도 안전을 위해 실증주의의 방패 뒤에 숨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 불만을 느끼는 몇 가지 사례를 예시한다.

 

 

조선 인민의 열망

 

해방 당시 조선 인민의 열망이 독립에 있었고, 나아가 민주국가 건설에 있었다는 견해에는 오늘의 조건에 따라 재단된 측면이 있다. 인민의 마음에 기쁨 못지않게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해방 당일의 적막한 거리 풍경이 말해준다.

 

1946813<동아일보>에 소개된 군정청 여론국의 조사 결과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설문의 4개 선택지에 대한 응답자 8453명의 선택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 자본주의 1189(14%)

() 사회주의 6037(70%)

() 공산주의 574(7%)

() 모릅니다 653(8%)

 

이 조사 결과를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응답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의미가 제한된다. 독립 열망의 표현에도 독립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열망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악질 친일파만이 아니라 독립의 의미를 정말 깊이 생각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 당당한 민족주의자 못지않게 최남선 같은 변절자에게서 얻을 교훈이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조선은행권 거액 발권

 

조선총독부는 98일 미군 진주 전에 약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해방 전 화폐량의 55-70%로 추정되는 거액이다. 인쇄 자체부터 벅차 징발된 민간 인쇄소에 평판(平板)을 보내 인쇄를 맡겼고, 정판사 위폐사건도 그런 평판 때문에 일어났다.

 

이 거액의 행방이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김계조 사건, 박흥식 사건 때 500만 원, 1000만 원의 출처가 빙산의 일각처럼 밝혀졌을 뿐이다. 상당 부분이 한민당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은 분명하다. 집회의 인원 동원,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자금 제공 등 당원들의 주머닛돈으로 보기 힘든 돈이 많이 움직였다.

 

일상생활에 쓰이지 않는 고액권(100)으로 발행되었으므로 얼마동안은 뭉칫돈으로 쌓여 있다가 서서히 풀려나오기 시작했는데, 19464월 미군정의 양성화 조치가 눈에 띈다. 인쇄 품질이 나빠서 상인들이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붉은 돈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조선은행이 보장하게 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화폐라면 위폐인데, 그 유통을 군정청이 보장해준 것이다. 군정청 관계자들의 몫은 얼마였을까. (송남헌의 회고 중 19466월 하지가 김규식에게 줬다고 하는 6백만 원도 군정청 공식 예산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 돈이 한민당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맡았을 것은 밝혀진 윤곽만으로 충분히 추정되고, 민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일이다. 그 구명을 위해 실증에 그치지 않고 추론까지 동원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중도의 역할

 

위에 언급한 19468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70%의 찬성을 받은 사회주의는 곧 중도 민심의 표현이다. 자본주의-공산주의의 극단을 꺼리는 민심이었다.

 

중도노선의 바탕은 민족주의였다. 정치체제의 선택은 민족주의와 다른 층위의 문제이므로 부차적 과제로 미뤄두고 민족국가 수립을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우익=민족주의등식은 극우파의 참칭이었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성향을 침소봉대한 극우파의 모략으로 인해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제 자리를 잃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이 인민위원회 구성에 민족주의 세력과 좌익의 합작을 유도한 데는 중도노선의 존중이 있었다. 좌익의 집권은 소련군이 허용한 자치권 위에서 서서히 (토지개혁의 성과 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반면 미군은 장기간의 군정을 통해 민심의 자연스러운 발전과 표현을 가로막았다. 분단에 임해 많은 민족주의자가 이북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해방일기 4> 머리말에 중도노선에 대한 내 생각 적은 것을 옮겨놓는다.

반면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이북과 같은)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좌우합작을 통해 역할을 스스로 만들러 나선 것이었다.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승자가 써준 역사의 장벽을 넘어 과거의 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실증의 기준을 최대한 늘려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아무리 많이 남아있더라도 논리에 맞지 않는 우익=민족주의등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저자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

 

나는 전통시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30년 전부터 제도권 학계를 벗어나 공부하다 보니 현대사에 마음이 많이 가고 그쪽 글도 많이 쓰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현대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서 역사학의 길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현상을 연구하더라도 그 의미가 현대사를 통해 확인된다는 생각이다.

 

현대사 연구 성과가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물 성격을 띠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시대 연구의 성과도 교양물 성격이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현대사 쪽은 연구 자체부터 좋은 교양물 만드는 목적의식을 앞세우기 바란다.

 

정병준 교수의 책들 중에는 문제의식과 서술방법 모두 교양서의 성격을 잘 갖춘 것이 많다. 이번 책은 그 점에서 오히려 다소 물러선 것 같아 아쉽다. 학계의 제도적 관행에서 슬슬 풀려나 자기 틀을 세울 만한 시점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아쉽다.

 

불원간 몇 주일 시간을 내 이 책을 확실한 교양서로 만드는 리메이킹 작업을 하면 좋겠다. 그런 작업은 단순한 독자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장차의 연구계획을 세우고 다듬는 데도 유용한 발판이 될 것이다. 교양서는 저자와 편집자의 합작물이라는 점에서, 편집자의 더 적극적인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독립운동을 하러 남양에?

 

홍명희(1888-1968)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 3년간 남양(싱가포르 등)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 회고 중에도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뿐,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지냈는지 정색하고 밝힌 내용이 별로 없다.

 

27세에서 30세까지, 누구의 인생에서나 매우 중요한 시기다. 홍명희에게는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910년 초 4년간의 일본 유학을 중도에 접고 귀국했고, 몇 달 후 조선 망국에 이어 부친 홍범식(1871-1910)의 자결을 겪었다.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2년 후 탈상하자마자 중국으로 떠난 것은 복국(復國)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말년에 자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 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비장한 각오로 중국을 향했던 홍명희가 6년 후 귀국할 때까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남양이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갔던 이 청년이 남양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넘어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명희에게 특별한 사람이던 신규식

 

홍명희의 남양 행은 신규식(1880-1922)의 권유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신이 홍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신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잡지의 조사(弔詞) 청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보여준다. 1922101일자 <동명>에는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홍명희가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가 조사 대신 실렸다.

 

대한제국 무관이던 신규식은 합방 후 자결 시도에 실패하고 중국으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쑨원을 위시한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길을 연 최대의 공로자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온 홍명희를 아들처럼 대했다. 순국의 뜻을 함께했던 인물의 아들에게서 뛰어난 천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청년을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서 남양 행을 권했을 것이다.

 

자결 시도 때 한쪽 눈 시력을 잃고 애꾸란 뜻의 예관(睨觀)이란 아호를 쓴 신규식은 아호와 달리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실력 양성이 외적 타도보다 독립운동의 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홍명희에게 남양 행을 권했다면 중국혁명을 지원한 화교사회와 같은 역할을 맡을 한교(韓僑)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홍명희는 남양에서 3년을 지내고 상하이에 돌아왔다가 곧 귀국했다. 남양 사업은 포기했으나 실력 양성의 길은 한결같이 지켰다. 귀국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신간회였고, 신간회가 좌절된 후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1918년 귀국은 해외 무장항쟁보다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였다. 귀국 후 신간회 등 조직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임꺽정> 집필은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했던 최선의 독립운동이라고 그는 자임했다.

 

 

신규식의 남양

 

신규식이 남양을 바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규식이 생각한 남양은 당시 중국인들이 화교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남양이었다. (“남양이란 말부터 중국에서 바라본 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대부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에서 인구의 4-5%를 점하는 화교는 준 지배계급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많은 인력을 현지에 데려올 수 없던 유럽인 지배자들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갖고 원주민과 유리된 정체성을 가진 화교집단을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남양 화교 인구는 19세기 초의 1백만 명 선에서 19세기 말 1천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자리 잡던 기간이었다. 유럽인 지배 아래 화교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현지 민중의 미움받이가 되기도 했다. 화교 박해 사태는 대개 식민지배 체제 아래 일어났다. 식민지배가 없을 때는 이주자들이 단순히 적응에 전념했으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화교집단의 호가호위(狐假虎威)’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래 남양 화교는 국가정체성이 약한 집단이었다. 중국인 정체성을 지키더라도 출신 지역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것이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었다. 19세기를 지나며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유럽인 지배자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서 본국의 뒷받침을 아쉬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보는 변법(變法)’과 국가체제의 교체를 바라보는 혁명두 갈래로 갈라졌다. 애초에 국가의식이 취약하던 화교사회는 혁명 쪽으로 치우쳤고, 본국의 조류가 무술변법(1898) 실패 후 혁명으로 기울자 혁명파의 지원 기지로 떠올랐다. 쑨원은 1903년 이후 아홉 차례나 남양을 방문하며 지원을 호소했고, 신규식이 가입한 동맹회는 그 지원의 통로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왜 홍명희는 남양을 포기했나?

 

홍명희가 깊이 존경하던 신규식의 권유를 따르지 못하고 남양 사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밝혀진 이유가 없으나, 신이 전해 듣던 남양 사정과 홍이 직접 겪으며 파악한 남양 사정 사이의 간격을 추측할 수 있다.

 

남양에 관한 신규식의 정보는 동맹회에서 얻은 것이었다. 혁명의 지원 기지로서 화교사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동맹회의 관점에서 현지 원주민은 지배-교화의 대상인 미개한 존재였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식민지배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화교사회와 비슷한 성격의 한교사회를 동남아에 건설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을 위한 유력한 방략이 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생각할 만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재력가들도 있었고 무력을 양성할 인적 자원도 있었다. 원주민과 유럽인들을 상대하는 데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못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살아보면서는 신규식의 막연한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주민도 차츰 근대문명에 적응하며 민족주의를 일으킬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교가 누려온 틈새가 그대로 한교에게까지 보장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교와의 이해관계 충돌도 동맹회의 도움만으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목표로 하는 한교사회설계의 구조적 어려움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본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현지 식민지배자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하면서 원주민에게 가해자가 되는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화교와 협력관계는 어느 선까지 가능할 것인가?

 

 

남양문명을 상상한다.

 

홍명희가 남양을 전전하던 때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 사정이 많이 연구되고 알려졌다. 대략 지금의 동남아다. 유엔 통계국에서 세계를 20개 남짓으로 나누는 통계 기준지역(geoscheme) 중 아시아 5개 지역의 하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와 함께)

 

많은 연구성과가 쌓여 왔는데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백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요컨대 외래문명(중국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유럽문명)의 정복(또는 감화) 대상으로 보는 타자화시각이다. 유럽인도 중국인도 이 지역에서 얻을 물질적 이득만 생각했지, 이 지역의 경험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을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교섭 상대로부터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상대를 타자아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상적 기준이 문명이다. 문명을 갖지 못한 미개인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우선 감화(또는 정복)를 통해 문명인으로 만들어놓아야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제 시작하는 작업은 남양문명개념의 설정에 목표를 둔 것이다. 근년의 연구성과 중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은데, 아직 제대로 묶여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역사학 방면의 역할이 필요한 단계라 생각되어 시도에 나설 마음이 들었다.

 

남양(南洋)”이란 말을 앞세우는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중국사 중심으로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남양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고찰의 주축으로 삼을 것이므로 중국의 남양인식에 출발점을 두려는 것이다.

 

또 하나 까닭은 남양문명의 배경으로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에 주목하는 데 있다. 동남아를 중심으로 태평양과 인도양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어족의 존재는 19세기 중에 유럽 언어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언어의 공유는 문명권 성립의 핵심 조건이다. 이 어족의 분포 상황 위에서 남양문명의 존재를 더듬어보려 한다.

 

(중국에서는 ‘Austronesia’를 직역한 남도南島란 말을 쓴다. 그러나 ‘-nesia’는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고 은 동양, 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이므로 남양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남양사>란 가제의 새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랑캐의  역사>를 마무리한 후 "근대국가" 집필은 다음 작업의 방향을 찾는 모색 단계였고, 이제 방향을 정해 2-3년간 진행하려 합니다. 블로그 올리기도 좀 잦아질 듯.)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