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참정권은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투표연령 제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일기> 작업 중 19475월 남조선입법의원에서 투표연령을 25세 이상으로 결정한 일을 살펴보면서였다. 51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670)

 

선거법 초안 중 선거권 자격을 만25세 이상으로 한 점이 눈에 띈다. 선거법 준비는 우익에서 앞장선 일인데, 전 세계에 유례없이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도 25세라면 몰상식하게 높은 나이인데, 하물며 그 시절에. 평균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중학교만(지금의 고등학교) 졸업해도 지식인으로 통하던 그 시절에. 젊은이들의 투표를 수구파에서 두려워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확인된다.

 

이 일을 들여다보며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권의 연령 제한이 하나의 근원적 결함이란 생각이다. 어린이들의 주권이 배제되어 유권자 평균 연령이 높기 때문에 10년 뒤 20년 뒤에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아랑곳 않는 정책 노선이 득세하기 쉬운 것 아닌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채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갓난아기에게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면 어떨까? 법률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선거권은 그 보호자가 대신 행사하게 한다. 아이들 수대로 부모들이 투표권을 더 행사한다면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쪽으로 정치에 압력이 일어날 것 같다.”

 

이 문제가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틈틈이 그에 관한 조사를 해보니 1947년 당시 투표연령은 거의 모든 국가가 20세 이상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부터 18세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미니 투표권을 알게 되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729)

 

“514일자 일기에서 선거권 연령 문제를 언급할 때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것이 있다. 미성년자라 해서 선거권을 주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일일까, 갓난아이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고 미성년자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몇 해 전부터 널리 검토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후 알게 되었다.

 

<Wikipedia>'Demeny voting' 조에 이 움직임이 소개되어 있다. 미성년자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는 것은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1986년에 발표한 의견인데 여기에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을 붙여 제창하는 운동이 2000년대 들어 확산되고 있다. 미성년자의 투표권을 부모가 절반씩 대신 행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아동투표권(Kinderwahlrecht)이란 이름으로 2003년 이 원칙의 도입이 투표에 붙여졌다가 부결된 일이 있고 헝가리에서는 연립 정권이 도입을 한 때 고려했다고 한다. (...)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의 선택에 있어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된 입법 기관과 행정 기관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정책 노선을 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미니 투표권이 환영받는 것이다. 아동 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 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 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 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몇 차례 적기는 했지만 이것이 장래 언젠가는 고려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었지, 그 현실적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2년 후 세월호 침몰사건 앞에서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몇 차례 칼럼을 쓰게 되었다.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 선택에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일으킨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되는 위정자들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 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 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은 인권의 핵심 요소다. 어린이들의 참정권이 배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당장의 혜택을 제시하는 후보들을 선택해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망치고 국가와 사회의 빚을 늘리게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길도 아니고 사회의 발전을 바라보는 길도 아니다. 세월호에서 보았듯이, 잘못된 정치의 피해는 미성년자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가 아니라 "대표 없이 피해 없다!"를 생각해야 한다.

 

의무교육이 끝나는 만 16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세계적 변화의 추세에도 맞는 길이다. 갓난아이를 포함해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연령층 어린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이들의 법적 책임을 대신해주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절반씩 대신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7483)

 

그때는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좋겠다는 정도 생각이었고, 이런 점도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글 하나 쓴 후 나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봄 세월호 침몰과 그 뒤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절실한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정책 여하가 어린이들의 행복은 물론 생명까지도 좌우하는 일이 많은데, '당사자'가 미성년이라 해서 정책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그래서 참정권에 관해 더 알아보고 더 생각해 보니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두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필수적인 제도를 지금까지 내버려두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근대민주주의의 역사적 조건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 주권'의 원리도 '보통 선거'의 원칙도 미성년자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선거 연령의 제한은 현실정치의 민주주의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결함이다.

 

백여 년 전 여성 참정권은 지금 어린이 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 못지않게 엉뚱하게 보이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을 배제한 '보통 선거'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여성 참정권이 겪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린이 참정권이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 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2791)

 

 

7년 만에 다시 생각하는 어린이참정권

 

 

이 글들을 읽은 이들 중에는 어린이참정권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이 꽤 있었지만, 현실적 가능성을 크게 생각한 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 책상물림의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두어 달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김원태 선생이 불쑥 연락을 주고 찾아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모처럼 나누게 되었다. 어린이참정권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니 내가 제일 열심히 이야기한 사람이라서 만나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동안의 공부로 이 주제에 관한 생각이 더해진 것이 더러 있다. 그래서 한 차례 다시 정리할 마음이 들었는데 마침 정치계의 분위기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탁상공론으로 묶어놓은 것이 무엇보다 젊은 연령층의 투표권 확대에 대한 보수정당의 결사반대라고 나는 생각해 왔는데, 그 자물쇠가 풀릴 모처럼의 기회 아닐까?

 

어느 사회단체 기관지의 원고 청탁이 있어서 조금 긴 글 하나를 써 보내고 나니 이 주제에 관한 생각을 모두 발표했던 <프레시안>에 그 동안 진척된 생각도 내놓을 마음이 든다. 2014년까지 발표한 내용과 가급적 중복을 피하면서 정리해 본다.

 

 

여성참정권은 평화운동의 표현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보통선거(universal suffrage)의 원리는 일찍부터 근대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제 가리키는 범위는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자격 제한에 가장 널리 적용된 기준이 재산, 성별과 연령이었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 미국 독립전쟁의 간판 구호였다. 뒤집어 말하면 세금 내는 사람이라야 대표 뽑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재산을 갖고 세금을 내는, 즉 사회의 구성과 유지에 경제적 공헌을 하는 사람이라야 참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철폐하는 결정적 계기는 18482월혁명 후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만들어졌다.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에게까지 머릿수대로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당시의 상식에 어긋나는 조치였다. 그런 몰상식한 조치가 취해진 것은 집권세력의 지지기반을 넓힐 필요 때문이었다. 그런데 권리라는 것은 한 번 주어진 뒤에는 다시 거둬들이기가 몹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종래의 몰상식이 상식으로 돌변하면서 보통선거의 원리가 강화되었다.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의 철폐, 즉 여성참정권의 도입은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앞 단계는 19세기 말까지 식민지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소규모로 도입된 것이고 뒤 단계는 20세기 들어 주권국가 단위로 진행되어 전 세계의 보편적 원칙으로 확립된 것이다.

 

소규모 도입이라도 지속적 추세가 시작된 것은 1869-70년 미국의 준주(territory: 새로 취득한 영토가 아직 주(state)로 승격되기 전의 행정조직) 와이오밍과 유타에서였다. 그리고 아일오브맨(1881), 뉴질랜드(1893), 남오스트레일리아(1894) 등 영국 식민지들이 뒤를 이었다. 유럽 본토에서 이 흐름에 처음 올라탄 것은 러시아의 대공국이면서 주권국가 성격에 가깝던 핀란드(1906)였다.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을 먼저 도입한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가 중앙부나 본국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저개발지역에 유입되는 인구 중에는 독신남성의 비율이 높았다. 독신남성은 정책의 선택에서 사회의 안정보다 투기 기회의 확장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1860년대 와이오밍에서 독신남성들은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에 비해 원주민에 대해 공격적이고 개발을 촉진하는 정책을 선호했다. 이런 투기세력의 과잉 대표를 막기 위해 온건한 사람들이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여성참정권 도입은 1913년 노르웨이에서 시작해 1919년 독일까지 대다수 유럽국에서 이뤄졌고 1920년 미국이 뒤를 따랐다. 이 흐름에서 뒤처진 영국과 프랑스에도 1928년과 1944년에 도입되었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1953년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1910년대 여성참정권 보편화는 한 마디로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은 두 방향에서 여성참정권을 밀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여성 인력의 동원을 위해서였다. 가정 안에 머물러 있던 여성의 외부 활동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다.

 

또 하나 전쟁의 영향은 평화운동의 발전이었다. 극도로 참혹해진 전쟁 양상 앞에서 국가들은 지금 벌어져 있는 전쟁만 넘기고 나면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약속의 확실한 표현 방법이 여성참정권 도입이었다.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은 긴밀한 관계 속에 발전해 온 것이었다.

 

재산과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의 철폐 과정에서 두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만인평등이념의 확장-강화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가 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하나다. 자본주의체제의 발전에 따라 경제활동의 참여 계층의 확장이 필요할 때 참정권이 평민에게까지 주어졌고, 그 체제가 한계에 부딪쳐 위기에 이르렀을 때 여성참정권이 주어진 것이었다.

 

또 하나는 참정권의 확장이 편입되려는 집단의 의지와 노력보다 기존 유권자 집단의 위기의식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민 중에도 여성 중에도 일찍부터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실제 변화가 이뤄진 것은 평민과 여성 집단의 주동적 권리 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 주류의 의식 전환에 따라서였다.

 

 

위기의식이 변화를 불러온다.

 

 

정치하나의 집단이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이루는 일련의 행위이고 그 결정 대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자원의 배분이다. 20세기 초까지 이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되어 있던 상황이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참정권 문제가 부각된 것이다. 백년이 지난 이제 연령에 따른 정치의 제한이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참정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고 나는 본다.

 

자원의 배분문제를 과거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는 자원만을 배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미개발 자원은 무제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되지 않은 천연상태의 자원이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소유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체제 덕분에 시장에서는 기()개발 자원이 아직도 힘을 쓰고 있지만, 인류의 장래를 위한 가치는 미개발 자원에 더 많이 담겨 있는 상황에 와 있다.

 

자원의 가치를 보는 시각은 연령층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10세 어린이에게는 50년 후의 상황을 고려해서 미개발 자원의 가치를 높여 볼 필요가 있다. 오염을 억제해서 천연상태를 최대한 보존해야 노년까지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70세 노인에게는 10년 후의 상황도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못 된다. 후손의 장래를 걱정해주는 마음도 없지 않겠지만 개발 억제로 인해 당장 내가 겪을 불편과 고통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사회 노령화의 문제가 겹쳐진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기면 고령화사회로 보는데, 한국은 2000년경 이 선에 도달한 후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계속되어 지금은 20%를 바라보며 더 심각한 단계인 고령사회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 노령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산인구 비율의 감소와 함께 미래에 대한 관점의 취약성이 지적된다. 목전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경향의 연령층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의 도입은 인류사회의 한 차례 가치관의 전환을 반영한 현상이었다. 무한한 진보의 믿음 위에 창조적 파괴에 몰두하던 19세기 분위기를 깨진 유리창의 우화가 대표했다. 빵집 아이가 유리창을 깨트렸을 때 유리가게 일거리가 늘어나 경제를 활성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빵집에는 손해가 되어도 사회 전체에는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기개발 자원의 가치만 보고 미개발 자원의 가치를 보지 않는 이 풍조를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로 반박했다. 그런데 1849년에 발표된 이 글의 주장이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란 이름으로 경제학계에 받아들여진 것은 1914년 폰 비저에 의해서였다. 자원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바스티아의 가치관이 경제학계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여성참정권이 정치제도에 도입된 것도 모두 세계대전의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20세기의 위기는 세계대전으로 나타났고, 21세기의 위기는 환경과 자원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백 년 전 위기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에서 온 것이라면 21세기의 위기는 인간사회와 외부(라 생각되어 온) 환경과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생각한 평화는 인간사회 안에서 싸움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환경을 최대한 착취하는 것은 당시까지도 사람들이 생각하던 평화에 공헌하는 길이었다.

 

21세기의 위기의식은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타난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에게 지구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일부였다. 지구의 자원을 다 소진하고 나면 더 많은 자원을 찾아 우주로 나갈 것을 꿈꿨다. 1969720일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을 때, 사람들은 몇 년 안 있어 달에 항구적 기지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곧이어 화성에도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우주비행사들을 신대륙을 열어준 콜럼버스의 후예로 생각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캐나다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은 <Weekly Noema> 인터뷰에서(2021. 2. 27, “Want not, Waste not") 이렇게 말했다.

 

일론 머스크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태계에게 회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무한정 계속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주로부터 자원의 반입이 불가능한 것이 확실해진 지금까지 우주정복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머스크가 우주관광장사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바로 암스트롱의 달 착륙 무렵부터 환경과 자원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밀의 최근 책 <거대한 전환 Grand Transitions>(옥스퍼드대학출판부, 2021)에는 인구, 식량, 에너지, 경제체제, 환경의 다섯 개 측면에서 이미 널리 지적되어 온 위험들이 최근 통계를 통해 정밀하게 파악되어 있다. 21세기에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확인해준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 도입은 인류사회가 경쟁보다 협력을 통해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는 지침을 세우는 계기였다. 지금 인류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인간사회 내부의 협력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도 협력관계를 세움으로써 미래에 대응하는 것이다. 어린이참정권의 도입이 그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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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27 14:15

    수능 준비할 때는 다수결의 원리 에 대해 한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다가, 대학을 가고 이후에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아졌고 다수결의 의미가 무섭도록 처연하게 느껴졌어요.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성립 원리이자 치명적인 한계 옆에 어린이 참정권을 올려 놓는 일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반대해서는 안되는 모순적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결의 파괴력은 터부시하면서 어린이참정권은 왜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요. 무시하고 배제할수록 민주주의에 합치하지 못하는 것일텐데요. 자기 자신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은 괜찮고 어린이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은 안괜찮은가 봅니다.

    • 2021.06.27 23:10 신고

      간판을 '민주주의'로 걸든 '능력주의'로 걸든 이념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는 없죠. 그래도 덜 나쁜 세상 만들려는 노력이 제일 집약된 성과물로서 민주주의에 아낄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지금 단계 민주주의에서 어린이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수준 이하의 결함으로 보입니다.

  2. 2021.06.28 10:57

    네! 어린이참정권이 담론으로라도 기능하면 좋을텐데 우스개소리로 치부되니 제가 좀 비아냥스럽게 말한 것 같아요. 원리에 치우친 면이 있다며 참정권의 역사 등을 세심히 해부하면서 쓰신 글인데, 일단 나오는대로 말하게 되어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2021.06.28 21:01 신고

      30년 전 학교 떠난 후 명목상 소속을 만든다는 게 (소속 없이는 여권 발급도 어려울 때였죠.) 신문사 연구위원이 되어... 시사칼럼도 일삼아 쓰게 되었다가 근년에 삼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어린이참정권 같은 주제는 버릴 수가 없군요.

  3. 2021.06.29 23:11 신고

    앞서 올렸던 글을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글로 바꿔놓습니다. 원래 글은 어느 사회단체 기관지의 기고문인데 발행이 한참 뒤가 될 것이라서 너무 일찍 여기다 공개해 놓는 게... 바꿔 올린 글은 오늘 프레시안에 발행된 겁니다.

1.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은 서로 다른 성격의 과업이다. 혼란된 상태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창업자에게는 구조와 형태를 임의로 결정할 여지가 많다. 빈 공간에 새 건물을 세우는 건축가처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공학적 구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하지만, 그 한도 내에서 많은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종전의 상태에 비해서는 어떤 건물이라도 대다수 신민(臣民)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워진 국가를 물려받은 수성의 군주는 건축가가 아닌 관리자의 입장이다. 관리자는 건물을 크게 바꾸기 어렵다. 어떤 변화에도 수혜자와 피해자가 함께 따르는데, 수혜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 아니면 피해자의 반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고 재정을 비롯한 모든 자원도 용도가 정해져있어서 임의로 활용할 여지가 적다.

규모 있는 왕조는 창업이 한 세대에 끝나지 않는다. 첫 세대가 기초를 닦고 다음 세대가 건물을 올리는 셈이다. 한(漢)나라는 고조(전206-전195)의 증손인 무제(전141-전87)가 창업을 완수했고, 당(唐)나라는 고조(618-626)를 이은 태종(626-649)이 창업을 끝냈다. 조선의 창업을 마무리한 것도 태조(1392-1398)의 손자 세종(1418-1450)이었다. 명(明)나라는 홍무제(洪武帝, 1368-1398)가 30년간 재위했지만 창업을 완성한 것은 아들 영락제(永樂帝, 1402-1424)였다. (중국 제왕의 호칭은 묘호(廟號)로 적는 것이 관례이지만 홍무제와 영락제는 ‘태조’, ‘성조’ 대신 연호(年號)로 적는 일이 많다.)

당 태종, 조선 태종과 영락제가 모두 초대 창업자인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후계자 자리를 쟁취한 것은 창업의 구상을 따로 가졌기 때문이었다. 초대 창업자는 중앙권력을 세우기에 바빴던 반면 그 후계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건국 방략을 제시했고, 그들의 권력투쟁 승리에도 그 방략의 타당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명나라가 원(元)나라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에는 ‘열린’ 몽골제국과 ‘닫힌’ 중화제국의 양면성이 있었다. 홍무제가 넘겨받고자 한 것은 중화제국이었다. 양자강 지역의 반란세력으로 출발해 남방 진신(縉紳) 세력의 지지로 원나라를 타도한 홍무제에게는 중국에 대한 지배력의 탈취가 목표였을 뿐, 몽골제국의 서방 관계는 관심 밖이었다.

홍무제는 30년간의 통치를 통해 황제전제(皇帝專制)의 체제를 구축하고 그 체제가 자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바라는 뜻에서 장손 윤문(允炆)에게 제위를 넘겼다. 영락제가 조카에게서 제위를 빼앗은 데는 개인의 권력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국의 발전 방향에 대해 홍무제와 다른 구상을 가졌던 사실도 그가 추진한 여러 가지 정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락제가 새로 찾은 길의 첫 번째 지표는 남경에서 북경으로의 천도였다. 남경은 홍무제가 초년부터(1358) 응천부(應天府)라는 이름으로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고 삼국시대 오(吳)나라 이래 여러 남방 왕조가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북경은 예전 한족 왕조들이 수도를 두던 황하 유역보다 훨씬 북쪽으로, 정복왕조인 금(金)나라와 원나라가 수도를 둔 곳이었다.

영락제가 1370년 연왕(燕王)에 책봉되어 20세가 된 1380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활동했기 때문에 천도의 이유를 권력 장악을 위한 영락제의 이기적 선택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토머스 바필드는 <The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 234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족 왕조로서 북방 변경 가까이에 수도를 둔다는 것은 몽골 문제를 불필요하게 키우는 길이었다. 남경에 수도를 두었다면 유목민의 침입이 귀찮기는 해도 먼 곳의 문제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정이 북경에 있기 때문에 유목민의 공격 하나하나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영락제의 북경 선택은 이 장기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수도 위치가 제국의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너무 편협한 해석으로 보인다. 서북방 유목민과의 관계는 중화제국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중대한 요소였다. 동남방에 수도를 두는 것은 북중국을 완충지대로 내놓는 소극적 정책이었다. 북경에 조정을 둠으로써 유목민의 공격 하나하나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황하 이북의 북중국이 과연 1644년까지 명나라 강토로 남아 있었을지 확언하기 어렵다.

영락제가 일찍부터 원나라의 옛 중심부에 자리 잡고 북방으로 옮겨간 원나라 잔여세력과 다년간 대결하면서 두 가지 배운 것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북방세력이 중화제국에 얼마나 큰 잠재적 위협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나라가 추구한 세계제국의 의미다. 몽골제국을 통해 동양과 서양 사이의 거리가 크게 좁혀져 있던 사실을 그가 인식하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중대한 사업, 정화(鄭和)의 함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2.

 

‘세계의 지붕’은 곧 ‘유라시아의 지붕’이었다.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중세기까지 따로 전개되었다는 생각은 들여다볼수록 굳어진다. 고원 북쪽으로는 인구가 희박한 사막과 초원, 동토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동서간의 교통이 어려웠다. ‘실크로드’의 의미는 그 장벽을 뚫고 약간의 교통이라도 이뤄졌다는 사실에 있다. 실크로드의 실제 교통량은 어느 시대에도 다른 문명권들 사이의 교통량보다 작았다.

몽골제국의 활동이 동서간의 거리를 좁혔다고 하지만 이전 시기와 비교해서 좁혀진 것일 뿐, ‘문명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13-14세기에도 동-서양 사이를 오간 사람들은 경계지역 출신이 압도적 다수였다. 동-서 문명권의 중심부는 그리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내부 균열에 따라 바로 길이 막히게 되었다.

파미르고원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 아열대지대를 뚫고 해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 해로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큰 규모의 제국으로 조직되지 않고 작은 세력들로 갈라져 있었다. 이 해로의 장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여러 경유지 현지세력의 양해와 협조가 필요했다. 원나라와 일-칸국 사절단의 편도 여행에 2-3년씩 걸렸는데, 당시의 항해기술에 비추어 매우 긴 시간이다. 통과할 때마다 현지세력과 교섭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부-루고드의 <Before European Hegemony 유럽 패권 이전> 306-307쪽에는 851년경으로 추정되는 한 페르시아 상인 술라이만(Sulaiman al-Tajir)의 중국 여행기록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페르시아만 입구에서 인도 남단까지 1개월, 말라야반도 북부 해안까지 다시 1개월, 말라카해협을 지나 티유마섬까지 10일, 그곳에서 중국의 광동까지 2개월 걸렸다고 한다. (윌리엄 번스틴은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으로 빚어진 세계> 81-82쪽에 술라이만의 일정을 소개하면서 항해 기간은 4개월 남짓에 불과하지만 항구에 체류한 시간을 포함하면 1년 넘게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붙였다. 이 추측은 조금 지나치게 길게 잡은 것 같다.)

술라이만은 9세기 중엽에 페르시아의 무스카트에서 중국의 광동까지 여행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11세기 이후 여행 기록이 늘어났을 때는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직항로가 이용되지 않고 있었다. 스튜어트 고든은 <When Asia was the World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절>(2008)에서 흥미로운 여행의 주인공이던 근대 이전의 인물 몇 명의 행적을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인도와 이집트 사이에서 활동한 유태인 상인 아브라함 빈 이주(Abraham Ben Yiju)였다. 빈 이주가 인도 서해안에서 12세기 전반기의 수십 년 동안 활동하면서 남긴 상당량의 기록 중에 중국 선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실을 고든은 주목한다. (118쪽)

이것은 차우두리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이 시기에(9세기에) 중동지역에서 중국까지 곧바로 가는 항해 노선이 있었다는 사실은 후세의 교역이 말라바르 해안과 말라카해협을 매듭으로 한 짧은 항로들을 묶어서 운영되던 관행에 대비되는 인도양 상업구조의 한 역사적 수수께끼다.”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49쪽)

차우두리는 앞 시기 직항로의 존재를 수수께끼로 보지만 내게는 뒤 시기 직항로의 실종이 진짜 수수께끼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중국과 페르시아 양쪽 모두 경제도 성장하고 조선술과 항해술도 발전했다. 그런데 9세기에 이용되던 직항로가 11세기에는 이용되지 않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몇 권의 책을 들춰봐도 이 수수께끼는 잘 풀리지 않는다. 떠오르는 짐작 하나는 이 시기에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업-경제와 정치조직이 큰 발전을 보았으리라는 것이다. 9세기까지는 이 지역의 자체 시장이 빈약하고 선박의 통행을 규제할 무력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나 11세기경까지는 동서 양 방면으로 수출할 자체 상품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양 방면의 상품을 수입하는 시장도 자라남으로써 ‘중계무역’의 기능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쿠빌라이는 남송 평정(1276) 직후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보냈다. 지금의 미얀마에 있던 버간(Pagan)왕국에 1277년, 1283년, 1287년에 출병했고 베트남에 있던 참파(Champa, 占城)와 다이비엣(Dai Viet, 大越)을 상대로 1282년, 1285년, 1287년에 출병했다. 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보다는 손실이 많았고, 지역 세력에게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았을 뿐, 실제 통제력은 확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다이비엣의 경우 1258년의 정벌로 조공관계를 맺고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세로 있다가 참파 정벌의 협조 요구를 거부하면서 1284년부터 다시 정벌 대상이 되었다.

동남아시아는 중국 왕조들이 명목상의 종주권에 만족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지역이다. 그런데 쿠빌라이가 이 지역 정벌에 큰 힘을 쏟은 데는 남중국해 해로의 확보에 뜻이 있었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측한다.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이후 4칸국의 분열에 따라 서방의 육로 교통이 어려워졌다. 육로가 막힌 원나라에게 해로를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그를 위해 해로의 기항지에 대한 통제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해로 확보의 노력은 1293년 자바 정벌의 참혹한 실패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 정벌의 실패 후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해상교통은 불편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을 때, 그 천하는 송나라 이전의 천하가 아니었다. 서방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가 중국사회에 널리 퍼져 종래의 ‘천하’가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이 알려져 있었다. 문명 초기부터 온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해 온 ‘천하’를 이제 ‘중국(中國)’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은 중국문명의 중심부만을 가리키던 원래의 뜻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과 대비되는 중국문명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원나라 황제는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더 큰 천하의 통치자를 지향했다. 원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는 명나라 입장에서 원나라 이전의 천하, 즉 중국만을 넘겨받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넓혀진 천하를 넘겨받으려는 뜻을 가질 수 있었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 사이의 선택이라는 쿠빌라이의 과제를 명나라 창업자들도 물려받은 것이다. 홍무제는 30년 재위기간을 통해 더 넓은 천하를 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영락제는 즉위 직후부터 서방으로 함대를 보내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다.

영락제의 정화(鄭和) 함대는 해로 확보라는 백여 년 전 쿠빌라이의 꿈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자바 원정에는 2-3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지만 함대는 빈약했다. 큰 배가 약 30미터 길이로 수십 명씩 태운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 함대의 주력인 보선(寶船)은 120미터가 넘는 길이로 한 척 한 척이 하나의 병영이었다. 쿠빌라이의 함대가 수송 기능에 그친 반면 정화 함대는 장기간의 원정을 위한 온갖 기능을 갖춘 하나의 군사기지였다. 무기와 생활용품의 생산과 관리를 위한 각종 공방(工房)이 갖춰져 있었고 2백 명 가까운 의원(醫員)이 탑승했으며, 심지어 채소를 경작하는 채마밭까지 갖추고 있었다.

정화 함대보다 백여 년 후 세계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의 항해(1519-1522)는 배 5척에 270명 인원으로 출발했다가 그중 18명이 배 한 척으로 돌아왔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의 항해를 큰 위업으로 여겨 온 통념에 비겨 본다면 그 1백 배 규모의 정화 함대는 불가사의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정화 함대의 업적을 엄청나게 부풀려 상상하는 풍조도 일어난다. (루이즈 리베이즈의 <When China Ruled the Sea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 시대>(1994)를 많이 참조했는데, 이 책에도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소개할 수 있는 범위로 인용 내용을 제한하려 애썼지만 의문의 여지가 남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선의 크기다. 120미터가 넘는 길이의 항해 가능한 목선의 제작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근년 용강(龍江)조선소의 발굴로 꽤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제작된 가장 큰 목선은 1765년에 진수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호로 알려져 있는데, 길이가 70미터에 못 미쳤다.)

정화 함대가 원나라 ‘세계제국’의 꿈을 이어받은 사실은 그 사령관이 색목인의 후예인 환관이었다는 데서부터 나타난다. 정화 외에도 함대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 중에 색목인 출신과 환관이 여러 명 눈에 띤다. 큰 국력을 기울인 이 사업을 정규 관료가 아닌 환관들, 그리고 서방 종교와 언어에 능통한 색목인 출신들에게 영락제가 맡긴 사실에서도 그가 ‘열린 제국’을 지향했음을 알아볼 수 있다.

 

 

4.

 

명나라 함대는 일곱 차례 남양(남중국해)을 거쳐 서양(인도양)으로 출동했다.

제1차: 1405년 7월에서 1407년 10월까지. 참파,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실론을 거쳐 인도 서해안의 칼리쿠트(Calicut, 古里)에 제일 길게 체류하고 돌아왔다. 정화 함대가 무력 사용을 극력 절제한 점이 이 항해에서부터 눈에 띈다. 자바의 마자파힛(Majapahit, 麻喏八歇)에서 내전에 휘말려 대원 백여 명이 살해된 일이 있는데, 가해 세력에서 오해였다며 사죄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해적 진조의(陳祖義) 일당이 장악하고 있던 팔렘방을 나가는 길에는 피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소탕한 일을 보면 무력 사용에 앞서 상황 파악에 매우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1407년 말에서 1409년 초까지. 제1차 항해에서 데려온 조공 사절들을 돌려보내는 이 항해에 정화 자신은 출동하지 않았다. 1년 남짓 걸린 이 항해는 충분히 확보된 정보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기간에 다녀올 수 있도록 기획되고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3차: 1409년 10월에서 1411년 7월까지. 1-2차 항해와 같은 해역에서 활동했지만 기항지가 크게 늘어났다. 윤곽만 파악해 놓았던 이 지역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라카(满剌加)를 샴(暹羅)의 영향권에서 독립시킨 것이다. 이 항해 중에는 적극적인 군사행동도 있었다. 실론(錫蘭)에서 현지의 5만 병력과 맞서다가 왕도를 급습해서 왕과 실력자를 포로로 잡은 일이다.

제4차: 1413년 말에서 1415년 8월까지. 이 항해는 종래의 해역을 넘어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이르렀다. 인도 서해안에서 호르무즈까지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데 25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충분했던 것 같다. 항해 준비 중 정화가 중국 최대의 모스크이던 서안(西安) 청진사(淸眞寺)를 찾아가 항해에 동행할 몇 사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 항해의 중요한 목적이 이슬람세계와의 접촉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5차: 1417년 가을에서 1419년 7월까지. 호르무즈를 거쳐 홍해 입구의 아덴을 방문하고 동아프리카 해안을 적도 부근까지 남하했다. 인도양 각지의 사정과 해류, 풍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빠른 일정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2차 항해와 마찬가지로 큰 군사행동이 없었다.

제6차: 1421년 3월에서 1422년 7월까지. 비교적 짧은 항해기간이지만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다녀온 것으로 보아 원활한 항해를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리베이즈는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 시대> 151쪽에서 정화가 북경 천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도중에 함대 일부를 이끌고 먼저 돌아왔으리라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근거는 확실치 않다.

제6차 항해까지는 항해 사이의 간격이 길어야 2년가량이었는데, 1422년 이후 항해가 여러 해 중단되었다가 근 10년 후에야 제7차 항해에 나서게 된다. 1424년 7월 영락제의 죽음이 물론 이 지연의 직접 원인이었지만, 영락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함대의 더 이상 출동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었다.

정화 함대와 함께 영락제가 큰 힘을 쏟은 사업이 북경 천도였다. 명나라 건국의 주축인 남방 진신 세력은 당연히 천도에 반대했다. 혜종(惠宗, 1398-1402)을 옹위하던 이 세력이 영락제의 등극으로 다소 풀이 꺾였지만 여전히 명나라 지배집단의 주축이었다.

홍무제가 1358년에 ‘응천(應天)’의 뜻을 내걸고 근거지로 삼은 남경은 중국 경제의 중심이 된 남중국의 중심지였다. 반면 북경은 정복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가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한족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변방이었다. 그런데도 영락제가 ‘순천(順天)’의 이름을 내걸고 북경을 제2의 황도로 삼은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는 통설과 같이 자신이 연왕(燕王)으로 기반을 닦은 곳에서 권력 관리를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명나라가 종래의 한족 왕조와 달리 원나라 체제를 이어받으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후자의 취지는 기존 논설에서 잘 해명되어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의 가설로 남겨두고 넘어간다.

영락제는 즉위 후 ‘순천부’에 행재(行在, 임시 황도)의 명목으로 머물면서 거대한 황궁을 지은 다음 1421년 초에 정식 천도를 거행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큰 불로 중요한 건물들이 타버리고 3년 후 영락제가 죽을 때까지 복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락제의 노선에 의문이 크게 일어났을 뿐 아니라 재정에도 타격이 커서 남방의 항해 활동을 재개하기 어려운 사정이 되었다.

 

 

5.

 

정화 함대의 탑승자들이 남긴 몇 가지 기록 중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이 가장 널리 참조된다. 4차, 6차, 7차 항해에 통역으로 참가했던 마환은 항해 당시부터 기록을 시작한 것으로 볼 때 기록 작성의 공식 책임을 가졌던 것 같다.

고든은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절>의 제7장(117-135쪽)에서 마환의 기록을 토대로 정화 함대의 활동을 살펴보는데, 교역을 진행하는 절차가 흥미롭다.

“왕의 대표자와 함대의 교역 주무관이 먼저 비단 등 중국 상품을 검사하고 가격을 정할 날짜를 잡는다. 그 날이 되면 모두 손을 맞잡고 ‘가격이 높든 낮든 누구도 그 가격을 거부하거나 바꾸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다음에는 도시의 상인들이 진주와 산호 등 귀중한 상품을 가져온다. 그 가격은 ‘그 날로 정해지지 않는다. 빨리 하면 한 달, 천천히 하면 두 달이나 세 달 걸린다.’ 그 이후 함대의 교역은 그렇게 정해진 가격에 따라 행해진다. 함대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가격 협상에 몇 달씩 걸린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가격과 조건을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함대 전체가 대기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대가 나가는 길에 들러서 협상을 시작시킨 다음 소규모 교역단을 상품과 함께 남겨두고 다음 목적지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볼일을 끝낸 교역단을 싣고 귀국했을 것이다. 몇 해 후 다시 함대가 올 때는 꼭 변경이 필요한 사항 외에는 전번의 협상 내용을 준용했을 것이다.

이 협상 방법은 필립 커틴이 <Cross-Cultural Trade in World History 세계사 속의 문화-간 교역>(1984) 132-133쪽에서 소개하는 ‘집단협상'과 흡사하다. 15세기를 전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서 시행된 관례로 커틴이 보는 이 방법은 입항한 배의 선장이 화물을 선적한 상인들을 대표해서 항구의 상인 대표들과 일괄해서 가격을 협상하는 것이다.

커틴은 이 협상 방법을 그로부터 백년 후 인도양에 나타난 포르투갈인의 태도와 대비하여 ‘자유무역’ 원리로 해석한다. 교역 중심지의 현지세력이 방문하는 모든 교역자들의 자유롭고 공평한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장기적 이득을 추구한 것이다. 정화 함대는 무력 사용을 절제하면서 현지 관행에 적응하는 방침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정화 함대의 활동이 명나라에 어떤 이득을 가져왔을까? 서방세계와의 교통로 확보가 장기적으로는 큰 가능성을 가진 사업이었을지 몰라도, 함대가 당장 가져온 것은 기린, 사자 등 신기한 동물과 진주, 보석 등 진귀한 사치품으로 전해진다. 후세에 중국의 대외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지대물박(地大物博)’을 내세워 교역의 필요성을 부정했거니와, 실제와 부합하는 주장이다. 근대 이전의 중국은 외부로부터 필수품의 수입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성이 강한 하나의 세계였다.

정화 함대를 통해 기린이 조공품으로 들어왔을 때 이 기이한 모습의 동물이 전설 속의 상서로운 짐승이라 하여 천명의 강림으로 축하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황제가 이를 물리치고 간소한 축하에 그쳤다고 전해진다. 새 황도의 건설과 함께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이라는 정화 함대에 대한 비판을 황제도 의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24년 영락제가 죽은 후 46세 나이로 즉위한 인종(仁宗)은 즉위 조서에서 해상원정의 중단을 선포하고 뒤이어 남경으로 수도를 되돌릴 방침을 발표했다. 순조로운 황위 계승이었음에도 중요한 정책들을 뒤집은 것을 보면 그 정책들에 대한 반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26세 나이로 즉위한 선종(宣宗, 1425-1435)이 북경을 수도로 확정하고 정화 함대를 다시 내보냈지만, 인종의 정책을 다시 뒤집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선종은 내실을 중시하는 인종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고 하여 두 황제의 통치를 묶어 ‘인선지치(仁宣之治)’라 부르기도 한다.

선종은 1430년 6월 함대 출동의 조서를 내리고 이에 따라 정화 함대는 이듬해 초 남경에서 출항했지만 정작 중국 해역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함대는 1433년 7월에 제7차 항해에서 돌아왔는데 정화는 도중에 칼리쿠트에서 죽었다고 한다. 많은 수수께끼가 남는다. 제7차 항해는 설거지를 위한 ‘마지막 항해’로 기획된 것이었을까? 선종 황제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대함대의 파견이 다시 있었을까? 확실한 대답을 직접 찾을 수 없지만, 그 후 명나라의 대외정책, 특히 해금(海禁)정책의 추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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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5%8D%97%E4%BA%AC/23952/2969896435/b2de9c82d158ccbff69a89741fd8bc3eb135415d?fr=lemma&ct=cover#aid=2969896436&pic=4e4a20a4462309f70f1a0e9b750e0cf3d6cad6c6 명나라 궁궐(남경) 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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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5%8C%97%E4%BA%AC/128981/0/5882b2b7d0a20cf4136d8bf279094b36acaf9919?fr=lemma&ct=single#aid=0&pic=023b5bb5c9ea15ce36d3f2d1ae4a2df33a87e850149b 북경 고궁(故宮)

 

https://baike.baidu.com/pic/%E5%8D%97%E4%BA%AC/23952/2969896435/b2de9c82d158ccbff69a89741fd8bc3eb135415d?fr=lemma&ct=cover#aid=2969896436&pic=9d82d158ccbf6c8156f1de1ab13eb13532fa407a 남경 부근 룽장(龍江) 조선소의 드라이도크 유적.

 

https://baike.baidu.com/pic/%E5%8D%97%E4%BA%AC/23952/2969896435/b2de9c82d158ccbff69a89741fd8bc3eb135415d?fr=lemma&ct=cover#aid=2969896436&pic=b7fd5266d0160924a1e450e9d90735fae7cd347a 남경의 발니(渤泥)국왕 묘. 보르네오에 있던 발니국 왕이 영락제의 조정에 방문 중 병사하자(1408) 왕후의 예로 묘를 만들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https://baike.baidu.com/pic/%E5%8D%97%E4%BA%AC/23952/2969896435/b2de9c82d158ccbff69a89741fd8bc3eb135415d?fr=lemma&ct=cover#aid=2969896436&pic=cdbf6c81800a19d86b3179f73efa828ba61e4616 정화의 묘는 남경의 명승고적 중 하나다. 그가 칼리쿠트에서 죽고 그곳에 매장되었으므로 이 묘는 의관(衣冠)만 모신 것이라는 설도 있다.

 

https://baike.baidu.com/pic/%E5%8D%97%E4%BA%AC/23952/2969896435/b2de9c82d158ccbff69a89741fd8bc3eb135415d?fr=lemma&ct=cover#aid=2969896437&pic=77c6a7efce1b9d164fab6093fedeb48f8d5464d0 남경의 중화민국 총통부(總統府) 유지.

 

https://en.wikipedia.org/wiki/Kozhikode#/media/File:Calicut_1572.jpg 칼리쿠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1572년의 코지코드(Kozhikode) 풍경. 오랫동안 ‘향료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고, 면직공업이 발달하여 ‘칼리코 천’에 이름을 남겼다.

 

https://en.wikipedia.org/wiki/Malacca#/media/File:Malaca,_Malaka,_Histoire_g%C3%A9n%C3%A9rale_des_voyages,_Paris,_Didot,_1750.jpg 1750년경 네덜란드 통치 하의 말라카 풍경.

 

https://en.wikipedia.org/wiki/Malacca#/media/File:St_Paul_Church_Melaka_7.jpg 말라카의 성바오로성당 유지. 동남아시아 최초의 가톨릭성당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ongol_invasion_of_Java#/media/File:Fleet_of_Kublai_Khan.JPG 쿠빌라이의 자바 정벌대 상상도.

 

https://baike.baidu.com/pic/%E5%AE%9D%E8%88%B9/845414/1/d1160924ab18972b8d874866eccd7b899f510ad8?fr=lemma&ct=single#aid=0&pic=91ef76c6a7efce1b0b4d0d4aa851f3deb58f65c8 제작 중인 정화 함대의 보선(寶船) 모형.

 

https://en.wikipedia.org/wiki/HMS_Victory#/media/File:Victory_Portsmouth_um_1900.jpg 1765년 진수해서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명성을 떨친 빅토리 호(HMS Victory)는 영국 해군 원수(First Sea Lord)의 상징적 기함으로서 아직도 현역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Ma_Huan#/media/File:YingYaiShengLan.jpg 마환의 <영애승람>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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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16 09:40 신고

    서울 나간 길에 친구 사무실에 들러 한 직원의 도움으로 길을 다시 뚫었습니다. 역시 오래 놀던 동네에 돌아오니 좋군요.

  2. 2021.06.17 01:13

    헉 축하드려요 ❤️❤️❤️❤️❤️❤️
    좋은 경험 하셨어요 ❤️❤️❤️❤️

  3. 2021.06.22 16:17

    티스토리에 답글을 달았는데 여기로 옮깁니다.

    정화 원정이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 사정이 아직 석연찮습니다.
    먼저 300대의 대규모 함선을 조직했는데 왜 100대 혹은 500대가 아닌 300대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대충 그당시 최대로 조업 가능한 규모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상식적으로 이 정도 국력을 기울이는 사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설정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조공무역을 international supply chain의 근간으로 하는 입장으로서 상대적으로 이익이 적은 소국들을 상대하기보다 대등하게 대규모 교역이 가능한 국가를 목표로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원교근공의 기치하에 300대 선단으로 러브콜을 보낼만한 곳이 어디였을까요?
    실론 습격에서 보듯이 인도가 의심이 되는데 15세기 인도가 소왕국들로 분열된 상황이어서 통크게 한방이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외에 당시 명제국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아직 남아 있는 몽골 한국들 외에는 없었고 유럽은 아직 대항해 전이라 경제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고..
    이런 이유들로 생각보다 재미를 못보고, 그렇다고 바닷길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들을 일일이 관리하는게 가성비가 낮은 사업이란걸 깨달은게 아닐까요?
    게다가 그사이 킵차크 한국이 붕괴되면서 기존의 육지 실크로드가 재게되어 더이상 매력이 사라진게 아닐까요?
    경제적 실리를 떠나 그렇게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견문이 폭발적으로 늘었을텐데 이에 대한 저술의 양과 질이 상대적으로 낮은것도 의문입니다.

    • 2021.06.22 22:54 신고

      인도보다는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 이슬람권을 바라봤겠지요. 당시 중국과 비교할 만한 생산력을 가진 지역들이었고, 실제 정화 함대도 그 방향에 공을 많이 들였지요.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관계에서 교역의 발전 가능성을 읽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정화 함대가 갔을 때는 명나라와 파트너가 될 만한 안정된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규모 사업은 접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지?

  4. 2021.06.26 22:10

    선생님..쉬어가는 코너로 선생님이 서른살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고 어떤 선택을 했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뭐고 돌이켜보면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가장 망령같은 것인지.. 뭐 이런 내용의 글 한편 적어주시면 안될까요? 요새 너무 막막하고 무섭고 힘들어요 ㅠㅠ 저에게 할아버지보다는 훨씬 젊으시지만 할아버지 무릎에 누워 머리칼 만져주시며 해주는 이야기같은거 듣고 싶어요. 제가 너무 어리석고 유치한가요 ㅠ.ㅠ ㅎㅎ 감사합니다.

  5. 2021.06.27 13:53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쫄보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게요. !!!!!!!!!!!!!!!!

 

 

1.

 

원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강한 기세를 보여준 왕조였다. 중화세계의 통일에 (또는 그 일부분의 통치에) 만족하던 다른 왕조들과 달리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서방에 대한 통제력을 지키려 했고, 일본과 자바 원정처럼 더 큰 천하를 만들려는 의지도 보였다. 경제와 학술, 문화에서도 서방, 특히 일-칸국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중국문명의 폭을 크게 넓히는 성과가 있었다.

 

그런데 수명은 길지 못했다. 천하통일을 이룬 왕조라면 최소한 150년 이상 지속되는 것이 보통인데 원나라는 1279년 남송 정복 후 90년 만에 중원에서 쫓겨났다.

 

강성한 왕조가 오래가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황위 쟁탈전 등 권력투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를 들먹이기도 하는데, 그런 현상들은 왕조 쇠퇴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다. 권력투쟁과 자연재해는 어느 인간사회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 폐단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원래 국가의 역할 아닌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인과관계를 추구한다. 역사 공부의 큰 목적이 교훈을 얻는 데 있는 이상, 어떠어떠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결과가 나온다는 관련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필요의 강박 때문에 조건과 결과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기도 전에 서둘러 인과관계를 재단하려는 추세가 흔히 나타난다. “그것이 진실로 어떠했는가라는 랑케의 말은 이런 추세를 경계한 것으로 엄밀성을 추구하는 근대역사학의 기반이 되었다.

 

왕조의 흥망 같은 거대한 사건은 성급한 해석의 대상이 되기 쉽다. 중국의 경우 지나간 왕조의 흥망을 돌아보는 역사가들도 또 하나 왕조 아래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왕조와 지나간 왕조를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하는 프레임에 갇히기 쉬웠다. 왕조시대 아닌 지금의 역사학도에게는 전통시대의 틀에 박힌 해석과 평가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왕조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여건 아래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하나의 조건, 예를 들어 상업의 발달이나 군벌의 강화가 왕조에 따라, 그리고 그 왕조가 처해 있던 단계에 따라 흥륭의 조건도 되고 쇠망의 조건도 되는 것이다.

 

원나라는 매우 특이한 여건과 특성을 가진 왕조였다. 일단 정복왕조의 개방성을 가진 왕조였는데, 개방성의 정도가 그에 앞선 요-금 왕조와 현격하게 달랐다. -금 체제에서는 지배종족과 한족 외에 제3세력의 역할이 아주 작았다. 예컨대 여진족의 금나라에서 거란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이 제3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반면 원나라에서는 서방 출신의 여러 종족집단을 총칭하는 색목인(色目人)4대 계급 중 제2 계급으로 당당한 역할을 맡았다.

 

학생 시절 색목이란 말을 처음 보고 페르시아인의 푸른 눈을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여러 부류라는 뜻의 각색명목(各色名目)’을 줄인 말이었다. 그 범위를 놓고 여러 학설이 엇갈리지만, 대체로 서방에서 원나라로 유입된 거의 모든 인구집단이 포괄되는 것으로 보인다.

 

https://baike.baidu.com/pic/%E8%89%B2%E7%9B%AE%E4%BA%BA/1297515/0/e7cd7b899e510fb3c2cb50b0de33c895d0430cc2?fr=lemma&ct=single#aid=1&pic=e7cd7b899e510fb3f6cea041d233c895d0430c15 드라마에 그려진 색목인의 모습

 

이 색목인의 존재와 역할이 원나라가 중국의 다른 왕조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위나 요나라의 경우 지배종족과 한족이 제국의 기본 구성 요소였다. 그 외의 다른 종족들은 외부의 오랑캐로 취급되거나 지배종족에게 기능적 도움을 주는 부차적 역할에 그쳤다. 금나라의 경우 거란족 귀족집단의 역할이 상당히 컸지만 여진족 귀족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바필드는 <The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원나라의 중국 통치는 그에 앞선 여진인과 아주 달랐다. (...) 여진인은 행정기술을 가진 중국인 관리들을 처음부터 서둘러 채용하고 그에 의존했다. 몽골인은 반대로 애초에 중국인을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을 관리로 채용했다. 자기네 방식과 언어와 문자를 각자 가진 사람들을 통해 중국 지식인 관료와 그 문화적 자산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길을 만들었다.” (219)

 

색목인의 역할은 원나라 체제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다. 중국을 통치하는 왕조이지만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는 중국을 통치 영역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원나라였다. 원나라 흥망성쇠의 모든 원인이 이 특성만으로 명쾌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은 될 것이다.

 

 

2.

 

1290년의 원나라 호구조사에는 대략 몽골인 1백만 호, 색목인 1백만 호, 한인(漢人; 북중국 주민) 1천만 호, 남인(南人; 남중국 주민) 6천만 호로 나타난다. (바필드, 같은 책 220) 몽골인과 색목인은 각각 전 호구의 약 1.4%인데 모든 관직의 30%를 점하고, 특히 고위직의 점유율은 훨씬 더 높았다. 색목인도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피정복 집단인데 이렇게까지 우대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몽골제국은 종족을 혈통이나 종교의 기준으로 차별하는 이념적 원리를 보이지 않았다. 먼저 항복하고 쉽게 복속한 세력을 상대적으로 우대하는 실용적 기준만 있었다. 금나라 백성이던 한인을 남송 지역의 남인보다 우대한 것도 이 기준에 따른 것이다.

 

원나라에서 색목인이 우대받은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중국에 들어와 방대한 인구를 통치하는 소수집단의 입장에서 중국인들에게 너무 큰 역할을 맡길 경우 체제 자체의 중국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 모든 정복왕조의 경험이다.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몽골제국은 다른 정복왕조에 비해 중국화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다. 그래서 또 다른 소수집단인 색목인에게 가급적 큰 역할을 맡기게 되었다.

 

원나라의 색목인이 인구 규모에 비해 큰 활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으리라는 사실도 생각할 수 있다. 색목인 중에는 상인, 기술자와 학자, 군인이 많았다. 행정인력으로 동원하기에 적합한 직업군이다. 또한 지역사회의 평판에 얽매이는 현지 중국인들에 비해 색목인은 좌고우면 없이 정책 집행에 전념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원나라의 지방관을 지낸 고려인의 흔적이 더러 화제가 되는데, 고려인도 색목인과 같은 기준으로 활용된 것 같다.

 

https://baike.baidu.com/pic/%E8%89%B2%E7%9B%AE%E4%BA%BA/1297515/0/e7cd7b899e510fb3c2cb50b0de33c895d0430cc2?fr=lemma&ct=single#aid=0&pic=b17eca8065380cd7de0a84caa644ad3459828184 색목인은 교역과 천문 관계 기술로 큰 인상을 남겼다.

 

원나라만이 아니라 일-칸국을 비롯한 다른 칸국에서도 외래인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제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경향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물자, 기술, 학술, 사상을 옮겨가며 활용하는 세계제국 안에서는 인적 자원의 교류도 제국의 새로운 통합성을 지향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몽골제국의 세계성은 원나라의 출범과 함께 4 칸국의 분열로 한계에 부딪혔다. 원나라는 두 개 칸국과 적대관계가 되었고, 유일하게 원 황제를 대칸으로 계속 받든 일-칸국과의 교통도 어려웠다. 쿠빌라이의 최측근이던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1285년 일-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결국 그곳에 눌러앉아 근 30년 여생을 지낸 데는 그럴 만한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돌아오는 길이 막힌 것이 직접 원인이었다.

 

볼라드가 일-칸국에 있는 동안 원나라에 간 두 명의 일-칸국 사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올슨의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에 보인다. (34, 49-50) 1298년 해로로 일-칸국을 떠났다가 3년 후 중국 해안에서 표류 중인 사신들을 원나라 관리가 구조해서 대도(大都)로 보냈다. 사신들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3년 동안 원나라에서 지낸 후 황제의 하사품과 함께 원나라 안에 있는 일-칸 영지에서 거둔 비단을 가지고 1304년 귀로에 올랐다가 한 사람은(Malik Fakr al-Din Ahmad) 이듬해 인도 어느 곳에서 죽고 한 사람이(Noghai Elchi) 1307년 돌아왔다는 것이다.

 

양측 자료가 남아있어서 약간의 내용이나마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행인데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오가는 길이 각각 3년씩이나 걸렸다는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가 1292년 일-칸국 왕비로 가는 공주를 모시고 가는 사행에 편승했을 때 항해에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데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육로가 원활할 때는 4-5개월 걸렸다.) 그럼에도 해로를 택해야 했다면 육로 사정이 얼마나 험악했는지도 비추어 알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Junk_(ship)#/media/File:Guangzhou,_Chinese_Boats_by_Lai_Afong,_c%D0%B0_1880.jpg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실용적 형태의 선박을 서양인들은 ‘junk’라고 불렀는데, ‘의 남방 발음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co_Polo#/media/File:Route_of_Marco_Polo.png 마르코 폴로의 행로. <동방견문록>의 내용은 많은 의심을 받아왔지만 관련 연구의 진전에 따라 참고 가치가 계속 더 커지고 있다.

 

둘째, 사행단이 폭넓은 교역활동을 벌인 사실이다. -칸 자신이 교역 자금으로 금화 10만 량을 맡겼고, 그밖에 사신들이 주변사람들의 투자도 많이 맡았다고 한다. 두 나라 사이 교역활동의 가치가 잘 인식되어 있는 반면 왕래가 어려웠던 사정 때문에 사행이 교역의 기회로 적극 활용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셋째, -칸의 영지가 원나라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50년대에 훌레구에게 그 영지가 주어질 당시에는 몽골 귀족이 아무 곳에나 영지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일-칸국은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어 있는데도 원나라 황제가 일-칸의 영유권을 존중한 것은 대칸으로서의 책임감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50년대에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가 중국과 페르시아 문명권 공략을 전담하면서 몽골제국의 어느 정도 분화는 본인들도 예견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1300년대에는 분화가 깊이 진행되어 있었다. 13034칸국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중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가라앉았지만 그 협정은 제국의 복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고, 독립국들 사이의 평화협정일 뿐이었다. 싸움을 계속할 이유도 줄어들 만큼 서로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3.

 

원나라 쇠퇴의 원인을 엄밀히 따지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하나의 측면을 짚어본다. 제국을 열린 시스템(open system)’으로 보는가, ‘닫힌 시스템(closed system)’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다.

 

중국사의 통일왕조들은 천하를 하나의 닫힌 시스템으로 보았다. 천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제국은 현실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이념적으로는 천하를 품는 것이었다. 농업을 천하의 큰 뿌리(天下之大本)’로 보는 관점도 여기에서 나온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1차 산업이다. 그 가치의 형태를 바꾸는 제조업이나 위치를 옮기는 상업은 가치의 근본적 창출이 되지 못한다. 실제 인민의 생활을 위해서는 제조업과 상업도 필요하지만 ()’인 농업에 비해 ()’으로서 부수적인 역할이다. ‘는 두터울수록 좋지만 이 지나치면 를 손상할 위험이 있다. 중국의 모든 왕조가 농업에 중점을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프랑수아 케네(1694-1774) 18세기 유럽의 중농주의자들도 이 생각을 많이 받아들였다. 중상주의(mercantilism)가 국가 간의 경쟁관계 속에서 경제정책을 고려한 것과 달리 중농주의(physiocracy)는 인간사회 전체를 단위로 경제의 득실을 논한 것이다. 당시 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풍(chinoiserie)’을 흠모하던 분위기를 대표하는 사례의 하나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의 선택은 지금도 중요한 문제다. 생태계의 성격을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환경정책의 방향이 달려있다. 캐나다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은 주간 <Noema> 인터뷰에서(2021. 2. 27, “Want not, Waste not") 이렇게 말했다.

 

일런 머스크(스페이스-엑스 우주개발 사업의 추동자)가 아무리 열을 올려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 생태계에게 회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무한정 계속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paceX#/media/File:Launch_of_Falcon_9_carrying_CASSIOPE_(130929-F-ET475-012).jpg 스페이스-엑스의 우주선 발사 장면. 머스크는 가까운 장래에 화성 개발을 통한 환경-자원 문제 해결을 제창한다.

 

몽골제국 대칸과 원나라 황제. 한 사람이 겸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는 입장이었다. ‘끝없는듯한 팽창의 길을 수십 년간 걸어온 몽골제국 입장에서는 4칸국의 분열도 더 큰 팽창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중화제국 입장에서는 격동의 시대를 정리하고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추세가 있었다. 몽골제국은 확장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열린 시스템이고 중화제국의 천하는 그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닫힌 시스템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co_Polo#/media/File:FraMauroDetailedMapInverted.jpg 1450년경 베네치아 수도사 프라 마우로가 그린 세계지도

 

원나라의 색목인 중용은 몽골제국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방인에게 관리를 맡김으로써 현지의 관성을 극복하는 것이 동서 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길이었다. 1234년 금나라 정복 후 중국을 중국식으로 통치하는 정책이 채택되었지만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정책일 뿐, 기본 정책은 열린 시스템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조의 쇠퇴가 확연해진 1315년에야 과거제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색목인 관리 아흐마드(阿合馬, Ahmad Fanākatī)의 경우가 흥미롭다. 1282년 암살당할 때까지 20년간 쿠빌라이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재정 담당 관리였다. 그의 암살자들은 바로 처형당했지만 몇 달 후 그의 부정부패 행각을 확인한 쿠빌라이는 아흐마드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비롯한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Bailo Acmat”라는 이름으로) 25명의 아들과 거대한 재산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이 인물이 백설처럼 청렴한 관리였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떡고물은 묻히더라도 떡을 워낙 잘 주물렀기에 오랫동안 신임을 받지 않았겠는가.

 

<원사(元史)> 등 중국 자료에는 아흐마드를 역대급 간신으로 모는 악평이 가득하다. 그런데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는 아흐마드가 재상 자리를 근 25년간 명예롭게 지켰다고 적혀 있다.(모리스 로사비의 <Khubilai Khan 쿠빌라이 칸> 182쪽에서 재인용) <집사>의 원나라 관계 정보는 볼라드에 많이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볼라드는 아흐마드 사건의 조사 담당자였다. 아흐마드가 흉악한 간신이라고 볼라드가 단정했다면 이런 서술이 나올 수 없다.

 

아흐마드가 죽은 후 몇 달 사이에 그에 대한 쿠빌라이의 인식이 과연 그렇게 거꾸로 뒤집힌 것인지 의문스럽다. 보통 넘게 영명한 황제인 쿠빌라이가 20년간 중용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부패와 독직의 증거가 얼마간 나왔다고 해서 그렇게 빨리 바뀔 수 있을까?

 

아흐마드와 함께 쿠빌라이 조정의 3대 간신으로 꼽히는 상가(桑哥, Sangha)와 노세영(盧世榮)이 있었는데, 3인을 이재파(理財派)’라 하여 한법파(漢法派)’와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있다. 두 사람은 아흐마드가 죽은 후 재정 부문에 중용되어 몇 해씩 열심히 일하다가 결국 탄핵과 사형을 당했다. 한편 한법파의 중심에 있던 황태자 진금(眞金)1286년 죽음에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선양(禪讓)을 주청한 관리가 있어서 (71세 나이의) 쿠빌라이가 진노한 상황에서 난처한 입장에 빠진 진금이 (43세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아흐마드의 암살자들이 쿠빌라이와 태자가 상도(上都)에 가 있을 때 태자 일행을 가장하고 대도(大都)에 들어가 아흐마드를 격살했기 때문에 태자의 개입이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쿠빌라이가 사후에 아흐마드 일당을 단죄한 데는 태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 것 같다.)

 

남송 정복(1279) 후 원나라 조정에서 재정 확장을 주도하는 이재파와 이에 반대하는 한법파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읽을 수 있다. 적극적 조세-전매 정책과 교역의 확대로 국내외의 재부(財富)를 최대한 국고에 수용하려는 이재파는 몽골제국의 경영을 바라보는 입장이었고, 중화제국의 조속한 안정을 바라는 한법파가 이에 반대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어느 쪽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오락가락한 것으로 보인다.

 

 

4.

 

왜 쿠빌라이는 재정 정책을 놓고 그렇게 오락가락했을까? ‘열린 제국의 길에는 재정 확장이 필요했다. 군사비가 많이 드는데 정복 지역의 약탈에 한계가 있었다. 정복 지역을 제국에 편입시키려면 그 경제를 무너뜨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남송을 정복할 때 남송 지폐 회자(會子)를 논란 끝에 원나라 지폐로 바꿔주기로 결정한 것이 단적인 예다. (독일의 마르크화 통합과 같은 성격의 문제였다.) 대운하의 회복과 확장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약탈을 억제하고 정복 지역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정책이더라도 당장은 재정의 병목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남송 병합 직후 일본과 참파, 자바 등지의 정벌 시도는 키워놓은 군사력을 활용해서 좀 수지맞는 사업, 약탈을 비교적 마음껏 할 수 있는 정복을 꾀한 것 같다. 원나라 사절을 죽인 것이 번번이 정벌의 명분이었지만, 여러 곳에서 사절이 죽임을 당한 것은 원나라의 요구가 지나치게 고압적인 것이기 때문이었으니 원나라의 도발로 봐야 할 것 같다.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직전인 1258년 투항한 고려는 쿠빌라이 조정의 특별한 우대와 보호를 받았지만 일본 정벌 기간에는 예외적으로 심한 착취를 당했다.)

 

정복 사업은 칭기즈칸 이래 몽골제국 확장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쿠빌라이에 이르러서는 서방 칸국들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서북방 내륙의 확장이 막혔으니 동남방 해양 방면의 확장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아리크 보케와의 쟁패에서 중국의 경제력으로 우위를 확보한 경험이 있는 쿠빌라이는 동남방에서 기반을 확장하여 서북방을 압도하려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그런데 동남방의 확장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중화제국의 닫힌 시스템의 완성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 텐데, ‘열린 시스템의 관성을 쉽게 되돌릴 수도 없었다. 쿠빌라이는 열린 시스템을 지향하는 몽골 대칸과 닫힌 시스템을 지향하는 원나라 황제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칸과 황제 사이의 방황이 재정을 담당한 ‘3대 간신의 운명에도 투영된 것이다. 3인 가운데 특히 상가의 경우에 쿠빌라이의 곤경이 여실히 비쳐 보인다.

 

상가는 파스파(八思巴, Drogön Chogyal Phagpa)의 측근이었다가 파스파가 티베트로 돌아간 후 쿠빌라이가 중용한 인물이다. 쿠빌라이가 제사(帝師)로 공경하여 모시던 라마 고승 파스파는 몽골어의 공식 표기법으로(다른 몇 가지 중앙아시아 언어에도 적용되는) ‘파스파 문자를 만든 것으로 보아 종교지도자만이 아니라 문화지도자로서도 큰 역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자는 한글 창제에도 중요한 참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쿠빌라이는 그를 자신과 대등한 지도자로 대접해서 문화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를 상석에 모셨다고 한다.

 

https://baike.baidu.com/pic/%E5%85%AB%E6%80%9D%E5%B7%B4/1055926/0/8326cffc1e178a82b901368b9b49648da977391242cf?fr=lemma&ct=single#aid=0&pic=8326cffc1e178a82b901368b9b49648da977391242cf 쿠빌라이는 파스파를 현실세계의 지도자인 자신과 대등한 정신세계의 지도자로 여겼다.

 

티베트가 원나라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 것도 파스파 때문이었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총제원(總制院)이라는 독립기관을 만들어 종교와 티베트 관계 업무를 전담하게 했고, 상가는 이 총제원의 관리로서 쿠빌라이의 신하 노릇을 시작했다. 1282년 아흐마드가 죽은 뒤 재정 담당자로 노세영을 그가 천거한 사실이 반대파가 그를 비난하는 큰 구실이 되었다. 상가 자신은 일반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총제원 업무에만 전념했는데도 쿠빌라이가 그의 천거를 받아들일 만큼 깊이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1285년 노세영마저 실각한 뒤 쿠빌라이는 상가가 직접 나서서 정사를 맡아주기를 간절히 바란 모양이다. 1287년 초 상서성(尙書省)을 새로 만들어 종래 정무를 총괄하던 중서성(中書省)과 대등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상가를 상서우승상에 앉혔다.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상가가 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각하고 처형당한 후 그 반대파(한법파)가 남긴 기록이므로 그에게 불리한 기록일 텐데도 그리 흉한 모습은 아니다. “지독한사람이었다는 인상은 분명하다.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권력이라도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고 짜냈다. 지주층은 물론이고 귀족, 황족과 심지어 황제의 친위대(keshig)까지도 그의 비리 척결에 시달려야 했다. 모든 사람의 미움을 사면서 4년씩이나 버틴 것이 신기한 일이고, 쿠빌라이의 절대적 신임을 알아볼 수 있다.

 

‘3대 간신중 노세영은 관직에 있은 기간이 짧지만, 아흐마드와 상가는 쿠빌라이의 더할 수 없는 신뢰를(상가 경우는 존경까지도) 받던 사람들이다. 로사비는 이들의 실각을 서술하면서 쿠빌라이가 제 정신이었는지까지 의심한다. (<Khubilai Khan> 199, “Was Khubilai, in fact, in charge?") 그리고 실각 후 가택수색에서 그들의 부패를 입증하는 증거물이 나온 것도 조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같은 책 193)

 

1279년 남송 병합에는 몽골제국 확장의 의미와 중화제국 복원의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쿠빌라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합쳐서 살려나가고 싶었고, 1280년대 일본과 동남아시아 정벌 시도는 그런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 시도가 실패하면서 원나라 재정은 대책 없는 곤경에 빠졌고, 어떻게든 돌파해 나가려는 의지를 아흐마드와 상가를 통해 나타냈지만 결국 장벽을 뚫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 진금까지 희생되었다.

 

 

5.

 

12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의 중세문명은 동경 90도 언저리를 경계로 두 개 영역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고 나는 보고, 이것을 동양서양의 구획으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중화문명이 오랫동안 확고한 주축으로 자리 잡은 반면 서양에서는 서아시아 대륙세력과 지중해 해양세력의 각축이 이어지다가 8세기에야 이슬람문명이 중심축으로 떠올랐고, 그나마 11세기 이후 이슬람제국의 쇠퇴에 따라 서양 전체가 전국(戰國)’시대에 빠져들었다. 이 시점까지 넓고 큰 서양에 비해 좁고 작은 동양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정치적 안정 덕분이었다.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의 흥기는 동-서양 통합의 길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문명 통합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동-서양 문명에서 쓸 만한 것을 배워 왔고, 그 학습 수준이 점점 높아졌다. 6세기 이후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 경영을 통해 중국으로부터의 학습이 활발했고, 8세기 이후 이슬람문명권에 편입되면서 서방으로부터의 학습도 활발해졌다.

 

13세기의 중앙아시아는 기원전 2세기에 사마천(司馬遷)이 그리던 수초(水草)를 따라 헤매는유목민의 세상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13세기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동-서양 문명의 이점을 섭취하는 데 익숙했고, 특히 교역의 이점에 밝았다. 몽골제국 흥기에 초창기부터 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제국의 정복 사업이 수지맞는사업이 될 수 있었고, 원나라의 제국 경영에도 색목인으로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복의 명목상 주체는 몽골인이었지만, 방대한 정복 사업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는 색목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제국 팽창의 동력은 약탈의 이득에서 교역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나 기반산업의 발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물론 농작물 품종과 제조업 기술의 교환과 전파를 통한 기반산업의 발전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비중은 크지 않았다. 교역의 확장은 사회 상층부의 재부를 늘려주었을 뿐, 생산력의 발전은 그만큼 빠르고 크지 못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팽창이 약탈로 시작해서 교역으로 이어졌다가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에까지 이른 과정과 대비된다.

 

몽골제국의 세계화가 교역의 세계화에 그치고 기반산업의 세계화에까지 이르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 주체가 동-서 문명의 중심부가 아니라 경계 지역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나아가 그 사실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기반산업의 세계화를 통해 바라볼 만한 이득이 양쪽 문명의 중심부를 움직일 만큼 아직 커지지 못한 단계였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과연 기반산업의 전면적 변화를 가져올 만한 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을 통한 유럽의 세계화와 비교해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제국의 기세가 4칸국의 분화를 계기로 꺾인 것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 현상의 밑바닥에는 세계화 동력의 한계가 있었다. 동력이 충분했다면 4칸국 사이에서 누가 패권을 차지하더라도 더 넓고 깊은 세계화를 추진했을 것이다. 4칸국 사이에 반세기 동안 패권경쟁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더 크게 바라볼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정도 분화된 상태로 각자 만족하고 제국의 재통합을 포기한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대칸의 타이틀과 함께 가장 큰 경제력을 확보한 원나라는 제국의 재통합을 위한 제1 후보였다. 쿠빌라이는 말년까지 그를 향한 의지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280년대 해양 방면의 연이은 군사적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재정적 난관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열린 시스템을 지향하는 몽골제국 회복의 꿈 때문에 닫힌 시스템을 지켜내는 중화제국 경영의 과제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원나라가 단명했던 큰 이유로 생각한다.

 

https://baike.baidu.com/pic/%E5%AD%9B%E5%84%BF%E5%8F%AA%E6%96%A4%C2%B7%E5%BF%BD%E5%BF%85%E7%83%88/8451763/0/fcfaaf51f3deb48fa5afceb5ff1f3a292cf57892?fr=lemma&ct=single#aid=0&pic=fcfaaf51f3deb48fa5afceb5ff1f3a292cf57892

https://baike.baidu.com/pic/%E5%AD%9B%E5%84%BF%E5%8F%AA%E6%96%A4%C2%B7%E5%BF%BD%E5%BF%85%E7%83%88/8451763/0/fcfaaf51f3deb48fa5afceb5ff1f3a292cf57892?fr=lemma&ct=single#aid=0&pic=3c6d55fbb2fb4316980079692ca4462309f7d382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 그려진 쿠빌라이의 초상은 중국 황제와 몽골 대칸의 풍모를 각각 보여주는 것 같다.

 

명나라는 원나라 천하를 넘겨받으면서 열린 시스템의 꿈과 닫힌 시스템의 과제도 함께 이어받았다. 영락제(永樂帝, 1402-1424) 치하의 대항해시대가 거창하게 펼쳐졌다가 갑자기 닫혀버리는 상황, 그 뒤에 왕조를 관통하게 될 해금(海禁)정책의 의미도 원나라에서 넘겨받은 이 유산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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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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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10 15:18

    드디어 고대하던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역시 정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원의 쇠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군요.
    그 자체도 미스터리인데 실마리가 아니라 답을 주셔서 오랜 의구심이 해소되었습니다.
    어려운 작업인데 뛰어난 지혜로 밝혀 주셨습니다.

    특히 원나라가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사이를 헤메었다는 개념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해

    '정복 사업은 칭기즈칸 이래 몽골제국 확장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쿠빌라이에 이르러서는 서방 칸국들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서북방 내륙의 확장이 막혔으니 동남방 해양 방면의 확장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아리크 보케와의 쟁패에서 중국의 경제력으로 우위를 확보한 경험이 있는 쿠빌라이는 동남방에서 기반을 확장하여 서북방을 압도하려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확장의 동력이 '막혀'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동남방으로 눈을 돌렸다고 서술하셨습니다.
    사견인데 동남방으로의 확장이 주동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결과'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치적인 지형도보다는 경제적 지형의 변화, 예컨대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어려워지거나 여러 한국들을 거치며 관세가 증가하는 등의 이유로 중원에 공급될 경제적 통로를 확보하고자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하고자 함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원나라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 될 수도 있겠고 여기서 실패했기에 이른 단명으로 귀결된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재의 상황에도 대입해 볼 수도 있는것이 중국의 일대일로도 제해권을 영미가 장악한 상태에서 교역의 장악이 가능한 육상 루트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가 대비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명나라 또한 초기에 막혀 있던 육상 실크로드 대신 원나라처럼 해상의 길을 찾다가 여러 한국들의 멸망 후 육상 실크로트가 재기되어 굳이 해상 루트를 탐사할 필요가 없어진게 아닌지요.

    저의 망상일 뿐이지만 다음번 정화에 대한 서술에서 좀 더 경제적 관점이 반영된 글을 읽을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 2021.05.12 01:01 신고

      진짜 열심히 기다리신 티가 납니다. ^^ 제대로 열어놓지 않은 상태로 모르고 있다가 일러주시는 덕분에~

      10세기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의 발전이 정말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연구가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한 것 같아서... 깊이 살펴보기가 어렵습니다만... 서북방과는 다른 방식으로 천하의 형세에 큰 몫을 키워가는 것 같은데... 힘껏 정리해 보겠습니다.

  2. 2021.05.12 10:54

    다음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1.05.27 11:52 신고

      https://blog.naver.com/orunk
      "다음 글"을 위 주소에 올렸습니다. 이곳 운영방법이 바뀐 모양인데 적응이 안 돼서... 당분간...

  3. 2021.05.14 09:10

    안녕하세요?
    귀하의 글을 그동안은 이곳에서 랜덤 액세스로 읽어왔는데
    '오랑캐' 만큼은 순서대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의미에서 독서노트, 를 한 번 적어보았는데
    이곳에도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19회는 그 전경에서는 원나라의 쇠퇴의 원인을 해명하고 있지만, 그 후경에서는 그 보다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몽골제국의 세계화가 좌절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전성기 몽골제국의 기세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개방성'을 제안한다. 개방성은 몽골제국을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 개방성이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팽창,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색목인 등용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방인 등용은 원나라 이전의 전통적 중화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에 정복왕조를 세운 또 다른 유목민인 여진인 또한 통치방식의 ‘폐쇄성’에 있어서는 한족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몽골제국의 개방성은 경제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처음에는 약탈, 나중에는 교역의 형태로.

    개방성이라는 하나의 ‘특성’을 거시적인 ‘체계’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몽골제국의 ‘열린 시스템’과 천하제국의 ‘닫힌 시스템’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

    원나라 출범은 몽골제국에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오래토록 ‘닫힌 시스템’으로 운영되어 온 중화제국은 그 운영방식에 있어 기존의 몽골제국과는 다른 방식을 요구했다. 달리 말해, 원나라는 기존의 몽골제국과 같은 수준의 ‘열린 시스템’일 수 없었으며, 기존의 통치 방식에 조절을 가할 필요성이 대두됬다. 두 시스템 사이에서의 갈등이 현실정치의 영역 (재정 정책을 둘러싼 이재파와 한법파의 갈등)에서부터 역사서술의 영역 (색목인 관리 아흐마드에 대한 상반된 평가)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쿠빌라이는 두 시각을 조화 시키고자 애썼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남송 병합(1279)을 꼽을 수 있다. 남송 병합에는 확장을 꾀하는 몽골의 방식과 안정을 추구하는 천하의 방식이 혼재되어 있었다. 남송 병합은 성공적이었지만, 뒤이은 일본, 동남아 정벌 (1280년대)은 실패였다. 남송 병합이 좌坐와 치馳의 조화를 지향했다면, 남쪽 정벌은 치馳에 치우친 결정이었다. “지나치게 확장한 국가들은 전술적 축소를 시도한다.” 는 명제가 몽골제국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정치경제적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한 이유다.

    타 지역으로의 확장을 넘어 타 행성으로의 확장을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세계화는 완성 단계에 와 있다. 세계화에 준하는 동서양 통합의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건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에서 였다. 몽골제국이 교역의 세계화 단계를 졸업하고 기반산업의 세계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건 기반산업의 세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충분히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득이 충분히 커진 것은 몇 세기 후의 일인데, 또 다른 오랑캐 제국이 일으키는 동-서양 통합의 움직임을 아래 글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근세 이전의 정복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정복이었다. 대규모 이주를 위해 땅을 빼앗기 위한 정복도 아니고,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정복도 아니었다. 이 정복의 기본 성격은 산업혁명에 발맞춰 진행된 경제체제의 확장에 있었으며, 이것이 이후 근대 제국주의의 일반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피정복 사회를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파괴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본국 경제에 유리한 형태로 피정복 사회를 개편하는 것이 정복의 목적이었다.” (페리스코프, 2009.3.4)

    중화제국은 바츨라프 스밀이 묘사하는 지구처럼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생태계였다. 아편전쟁 이후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를 경험한 중국문명권이 감내해야 했던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 사이에서의 갈등은 쿠빌라이의 그것에 비해 더욱 극단적이며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시스템에 내재된 논리가 일으키는 관성은 어떤 상황에서는 그 자체가 질서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새롭게 주어진 과제의 본질을 살피지 못하고 시스템의 논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직성(systématique)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원나라의 쇠퇴가 후자의 사례였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 사이에서의 갈등은, 원나라 멸망과 함께 해결된 것이 아니라, 명나라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능력을 가질 만큼, 오래토록 지속되었다.)

    원나라의 멸망 원인이 상부구조에 있었다면, 몽골제국의 분열과 쇠퇴는 하부구조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화 동력 고갈)

    19회에서 배워가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위상 변화다.

    색목인의 임관과 활약, 색목인의 이주와 삶, 색목인 관사의 초상, 색목인 가족의 역사 … 국내 논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색목인’을 검색어로 넣었을 때 표시되는 제목들이다. 동아시아 역사 속 어느 시점에 등장했던 색목인이라는 이색적인 ‘타자’를, 보다 가깝고 실감 나는 존재로 그려내는 작업에서 많은 연구자가 가치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색목인의 역할을 새롭게 의미화 시키는 작업 또한 요청된다. 예컨대, ‘오랑캐’라는 독특한 행위자를 중심으로 문명의 지나온 길을 파악할 때, 색목인에 보다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만 하더라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에 대한 시각이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이 이야기한 '수초를 따라 헤매는’ 이미지에 머물러 있다. 실제는 다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문명 바깥의 방랑자로 출발해, 두 문명권의 경계에 선 학습자로 자라났고, 몽골제국 경영을 돕는 문명 내부의 참여자로 올라섰다. 중화제국의 inertia와 몽골제국의 initiative사이에서 독특한 위상을 누리면서, 그 삼투압 현상으로부터 짭짤한 이득을 챙겨갔던 것 같다.

    <오랑캐의 역사>의 다른 회차도 그렇지만, 19회도 상당히 뒷골이 쑤시는 회차였다. 문천에 의해 제시된 프레임은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지구 바깥 다른 층위 (성층권)에서 사태를 조망하는 인공위성적 시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심부에서 도망나와 잠망하는 페리스코프적 시각을 혼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벽초를 읽으며 조금 쉬어야 겠다.

    • 2021.05.14 20:41 신고

      대충대충 읽으시지, 뭘 이렇게까지? ^^ 혼자 고생이 아닌 거 같아서 위안이 되고... 짚어주신 데서 더 생각할 것들도 있군요. 감사~

  4. 2021.05.25 11:53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제가 읽어도 너무 폭발적인 글이라 선뜻 댓글 못 달았었어요. 무슨 말이든 이글에 어울리지 못하는 말 같아서요. ㅠㅠ 요즘은 문득문득 선생님 삶이 진심으로 멋있다는 생각을 해요. 진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저도 저 몽골 사람들 같은 순수?와 재능을 갖고 싶어요.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글이에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 2021.05.25 22:50 신고

      "폭발적"! 큰일났다! 서양사학계에서 '역사테러범'으로 몰릴까봐 조마조마한데~ ^^ 작업 시작할 때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저도 힘들면서도 재미있습니다.

    • 2021.05.27 11:42 신고

      https://blog.naver.com/orunk/222369612511
      다음 회 글을 이 주소에 올려놨습니다. 카카오계정을 통하지 않고는 글을 올릴 수 없게 된 모양인데, 어떻게 하는 건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해서~ ㅜㅜ 길을 찾을 때까지는 저 쪽에 올려야겠습니다.

  5. 2021.05.27 18:46

    헉 진짜네요 ㅠㅠ 찾아보니 올해 5월부터는 카카오 계정과 연동해야만 된다네요 ㅠㅠ 교수님 그래도 휴대전화 말고 인터넷으로도 카카오계정 생성이 되나 봐요. 페리스코프 티스토리가 너무 아까우니 만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여러모로 속상하네요 ㅠㅠ 교수님이 저보다 더 잘 찾으실 것 같지만 혹시 몰라 방침 설명 페이지에 안내된 계정 생성 주소 남겨놔봐요..

    https://accounts.kakao.com/weblogin/create_account?continue=https%3A%2F%2Faccounts.kakao.com%2Fweblogin%2Faccount%2F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