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 21:34

10여 일 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통보서가 왔는데, 시력이 제목처럼 표시되어 있다. 검진 받을 때 시력검사표의 중간께까지 알아볼 수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중학생 때 양쪽 다 0.1로 측정된 이래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혹시 시력검사표를 표준 거리보다 가까이서 본 것 아닌가? 통보서에 분명히 찍혀 나온 걸 보고도 이게 진짠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든다.

 

안경 안 끼고 다닌 지 1년 넘는데도, 시력이 좋아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다. 안경의 도수는 조금씩이라도 더 높아져 왔고, 안경 안 끼고 살게 된 것은 그냥 귀찮아서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이 남들 하는 것 다 하고 살 수 없는 것처럼, 눈 나쁜 사람이 남들 보는 것 다 보고 살려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시력이 진짜로 좋아졌다니?

 

검진 받은 직후에 옛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그 동안 지낸 얘기를 나누다가 생각이 나서 시력이 좋아진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친구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뜸 진단을 내려준다. "그게 근시에서 원시로 넘어가는 과도적 현상일 거야." 아! 수십 년 정을 나눠온 친구지만 이런 소리 할 때는 정말 싫다!

 

아무려면 어떤가. 과도적 현상이라도 과도기가 십년만 계속되었으면! 어차피 양쪽 눈 0.0으로 돌아갈 텐데, '과도'란 말을 꼭 듣기 싫어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

 

작금의 사태 속에 정치인 중 박지원의 역할이 돋보인다. 사안의 요점을 잘 짚으면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입장을 세우려는 노력이 탐탁해 보이는 대목이 많다. 어제도 좋은 태도를 보여준 것이 있다.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102854

비박계의 "주도권"을 강조한 점. 정치인들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박 의원은 "주도권"과 함께 "책임"을 비박계에 떠안기는 것이다.

탄핵에 동참하려는 의회세력 중 비박계의 비중이 숫자로는 크지 않다. 그러나 탄핵이라는 해결방법의 성공을 위해서는 그 역할에 결정적 중요성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도권"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태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그 "주도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 수 있는데, 박 의원은 그런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요즘 "부역(附逆)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흑백론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풀을 뽑을 때 뿌리까지 들어내지 않으면 헛수고가 될 것을 물론 걱정해야겠지만, 혼란한 상태에서 지나친 엄격함은 사사로운 동기가 끼어들 빌미를 줄 수 있다. 적어도 "새누리당"이라는 딱지를 "재활용 불가"의 기준으로 등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좋은 글 하나 봤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4735

"야당, 계산기 두드리지 마라"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사회에 문제가 나타났을 때 시스템 전체의 복합적인 문제로 보기보다 단순한 국부적인 문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인식체계의 구조적 특성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문명의 '환원주의' 성향 때문에 더 심해지기도 한 것이다. 제대로 파고들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까 완벽한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환원주의다. 건강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해서 완벽한 치료보다 상대적 향상을 꾀하는 한의학을 비롯한 전통의학과 우리가 익숙한 근대의학을 비교하면 그 성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최순실과 그 "부역자"들을 응징하고 배제하기만 하면 정의가 세워지고 정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데도 환원주의 성향이 작동하는 것 같다. 물론 큰 방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림짐작만으로 나아가다가는 해결하는 문제보다 새로 일으키는 문제가 더 클 수 있다. 예컨대 박근혜를 탄핵 대상으로 여기면서 내가 원하는 범주의 인물을 그가 총리로 임명해 주기 바라는 모순도 그런 데서 나온다. 그런 모순이 탄핵 전선에 균열을 일으키고 박근혜 일당에게 방어 내지 반격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장 교수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을 주로 염두에 두고 "이익의 정치"보다 "가치의 정치"를 당부하는데, 탄핵 전선의 균열을 막으려는 뜻으로 읽힌다. 歐陽修의 "朋黨論"에서 소인의 모임은 이득을 따르기 때문에 쉽게 흩어지고 군자의 모임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단단하다고 한 의미를 따른 것이겠다.

 

좋은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이 행여 현실주의보다 이상주의를 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득"의 크고 작음을 잘 가릴 필요를 더 강조하고 싶다. 지금 한국의 정치계는 "이념"을 논할 수준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익숙해져 있는 "이득"에 대한 인식을 더 투철하게 하는 것이 당장의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작은 이득에 휘둘리는 형편없는 수준을 일단 벗어나고 난 다음에 이념 생각은 천천히 해도 좋지 않겠는가.

 

김무성이 "대권 포기"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막 들었는데, 이것이 이득의 크고 작음을 잘 가린 태도라고 나는 본다. 정치인이 웬만한 존재감을 갖게 되면 "잠룡"이란 수식어가 붙곤 한다. 잠재적 대권 주자로 인식되어야만 세를 규합할 근거가 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모두 그 딱지를 붙이고 싶어 안달이고, 한 번 붙이면 떼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의 "절대 권력"을 전제로 한 관습이다. 드러나고 있는 박근혜의 작태처럼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세력이 모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절대 권력의 해체가 민심의 표적 아닌가. 문재인 같은 "가장 유력한" 주자라도 그 민심에 부응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문재인이 과도정권의 총리로 나섬으로써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 바란다고 지난 주 썼던 것이다. 현실적 가능성이 더 적은 잠룡들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나는 김무성이 "훌륭한 정치인"은 아니라도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장 교수 글도 좋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더 마음에 드는 글이 하나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4588

"누가 박근혜의 '명예로운 퇴진'을 말하나" 유종성 호주국립대학교 교수

 

이런 대목에서 유 교수의 현실적 관점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야권에서 우려하는 것은 보수적인 황교안 총리가 헌재의 탄핵 심판 기간 중(40~50일간 예상)과 헌재의 탄핵 결정 시 대통령 보궐 선거 기간 중(60일간 예상)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게 되는 문제이다. 필자는 황 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황 총리가 보수적인 인물이긴 하나 박-최 게이트에 연루된 정황은 없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 독단적으로 지나친 권한 행사를 하면 문제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지금 거대한 성난 민심에 의해 탄핵이 진행되는데, 황 총리가 권한 대행 지위를 이용해 민심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황 총리가 권한 대행으로서 지위와 권한을 남용하여 걸림돌이 되면 국회가 단 2~3일이면 탄핵을 의결할 수 있고, 그 즉시 황 총리의 직무가 정지되며 헌재의 탄핵 심판 기간 중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게 된다. 테크노크라트인 유 부총리가 권한 대행을 하면 민심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정치적 행위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탄핵을 바라보는 사람들 대부분이(나도 포함해서) "탄핵은 좋은데, 그러다가 황교안 같은 인물이 정부를 이끄는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갖고 있다. 그 걱정 때문에 어떻게 하면 탄핵 시점에서 괜찮은 인물이 총리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될까 하는 궁리를 하게 되고, 바로 그 때문에 박근혜가 아직도 쥐고 있는 칼자루가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황교안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허수아비 총리 노릇 좋다고 해온 사람이니까 내가 존경할 만한(또는 좋아할 만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서 과도정권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박근혜나 우병우 같은 강심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눈치꾼이 소신가보다 "과도적" 역할에는 적합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박근혜의 "때"가 묻은 사람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결벽증은 지금 현실에서 혼란을 더 부추길 소지가 있을 것 같다.

 

탄핵을 지향하는 논설 중에 "신 보수" 진영의 형성으로 모처럼의 쇄신 기회가 도루묵이 될 것을 걱정하는 기색이 많다. 보수주의자를 자임해 온 나로서도 이 나라에 바뀌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이 기회에 좋은 변화가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도루묵 될까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한 술 밥에 배가 부르겠는가? 이번 기회를 가져온 것은 보수 노선의 좌초가 아니라 박근혜 일당의 일탈 아닌가? 그 일탈만 응징이 되고, 그런 일탈을 가능하게 한 조건만 해소가 된다면, 장차의 바람직한 변화가 더 순조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나친 욕심을 억누르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