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ld hardly ever fails to visit me at the turn of the seasons. It is an unwelcome guest indeed, but not anything to make a great fuss about, either. Like an old acquaintance, I can guess roughly what kind of trouble it will bring me, and do not bother to take any pills burdensome to my stomachs.

 

A little heat, a few accompanying symptoms, and the tired feeling. I just accept them without much ado. Some people talk about the drunken feeling, but that is not my lot. I just enjoy the laziness of a few days this guest brings along. It allows me not to feel obliged to read anything serious, and even better, encourages me to ignore petty regulations and what other people think of me. I really find some comfort in it.

 

They say that illness is the worst thing in prison, but not for me. The laziness brought along eases the tension of prison life to a considerable degree. Most pleasant of all is the period of convalescence, during which dynamic energy replaces the tired feeling and my head is filled with clearness. This clearness brings me insights and enables me to reorganize my thought, more than compensating for the time idly wasted.

 

The seasonal cold, like a good sleep, is a healthy rest for me. Also, it is a promise for a new dawn, a new start.

 

[by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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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겪는 일, 생각나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은 모두 여기에 적기로 하고 지내지만, 사람의 일 중에는 더러 가려 놓아야 할 것도 있다. 청춘 남녀를 사귀도록 소개해 주고 그 결말이 공표되기 전에 여기 적는 것도 삼가야 할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봄 Y와 B를 소개해 줄 때, 그 하회를 반년도 안 되어 여기 적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B가 해외 체류 중이어서 서로 잘 맞더라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이 붙자마자 메일질을 중요한 일과로 삼는 것 같더니, 불과 4개월 만에 결론을 다 내 버린 기색이다.

 

너무나 기쁜 일이어서 보름 전 귀국한 뒤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자랑을 시작했다. Y가 이 사실을 알고 B에게 선생님이 동네방네 소문내고 있다고 걱정했더니 B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교류 범위가 넓지 않아서 소문내 봤자 거기가 거기니까 걱정 마세요." 하더란다. Y와 엊그제 점심 함께 하면서 들은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 적을 마음이 들었다. 한적한 동네니까 소문내 봤자 거기가 거기겠지.

 

Y의 아버지가 마당에 꽃이 좋으니 꽃 보며 한 잔 하자고 지난 봄 청해서 갔을 때, 그 집 딸이 꽃보다 더 눈에 들어왔다. 제주 살며 처음 볼 때 초딩이었나, 중딩이었나, 씩씩한 어린이로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고, 근년에는 꼭 한 번 밖에서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집에서 보니 활달하면서도 튀지 않게 자기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 손님들과 자기 부모님을 두루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아주 넉넉해 보였다.

 

돌아온 뒤에 B 생각이 났다. 자기 일을 잘할 뿐 아니라 자기 생활도 잘 챙기는 편으로 보기는 하지만, 뭔가가 아쉽게 느껴지던 친구다. 근거랄까, 좌표계랄까? 자신의 일과 생활이 갖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준. 그가 여자친구 사귀기를 보통 넘게 좋아하는 것도 스스로 그 아쉬움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Y를 보니, B를 꽉 쥘 수 있는 인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서로의 하는 일을 넓고 깊게 이해하며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고, 라이프스타일도 서로 꽤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Y에게 이런 사람 사귀어 보면 어떻겠냐고 메일로 물었더니 그의 글을 좋아한다고, 기꺼이 사귀어 보겠다고 응답하기에 ('내숭'과는 웬수진 아가씨다.) 양쪽에 메일 주소를 가르쳐줬다. 생전 처음 해보는 중매인데, 해보니 힘들 것 하나도 없다.

 

보통 중매장이들이 하지 않는 특별서비스를 하나 한 것이 있다. 두 남녀가 메일질을 시작한 직후 Y와 그 부모님을 끌고 B의 고향 동네로 2박3일 놀러가 B의 부모님과 안면을 트게 한 것이다. Y와 B 두 사람 사이의 '케미'가 잘 풀릴 것에 대해서는 내게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으로 내게 생각된 것은 Y의 등장이 B의 가족관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B가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단계에서 그 부모님을 뵙고, 가족 간의 여러 관계가 나란히, 어울려 자라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뒤의 진행에 관해서는 본인들이 간간이 알려주는 것만 듣고 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감동적인 대목들이 있었다. 한 번 Y가 혼자 B의 집에 다시 가서 그 어머니와 단둘이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는데, 직후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Y는 끌어안고 함께 울 수 있는 아이더라" 했다고 한다. 아들 일은 아들 스스로가 결정할 것이라고, 부모가 더 간여할 일이 없다고 공식적으로는 표방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이렇게 움직였다는 '참고사항'이 얼마나 값질 수 있는 것인가.

 

양가 부모님 네 분이 모두 나랑 두어 살 안쪽의 같은 또래로, 마음이 넓고 유연한 분들이다. 양가 자녀의 결합이 현실을 이끌고 가는 큰 흐름이라고 볼 때, 노친네들이 (이 구경꾼도) 이 흐름을 함께 즐기면서 흐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나는 바람직한 길로 본다. 현재와 과거를 대립시키는 E H 카의 관점에 불만을 가진 이 역사학도 구경꾼은 모든 과거의 축적이 함께 현실을 구성한다는 관점에서 역사 인식을 더 절실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Y와 B의 결합이 개인과 개인의 원자론적 결합을 넘어 양가 부모님까지 끌어들이는 유기론적 관계로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며 이 믿음을 다시 확인한다.

 

당사자 2인에 주변 4강을 끌어들이는 6자회담을 추진하는 셈인데, 아무래도 6자 중 B의 입장이 내게는 제일 가까이 느껴진다. 직업이 같기 때문이다. 어제 그에게 보내는 메일에 이렇게 썼다.

 

어제 Y 이야기 들으며 "등신대 거울"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모든 인간관계에는 거울의 의미가 있는 건데... 남녀간 관계에서 특히 그 의미가 큰 것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겠죠. 조그만 조각거울로 나 자신의 어떤 특성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가 없죠. 좋은 거울은 일단 크기가 충분해야 하고, 맑아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건데, 덩치가 작지 않고 변화도 적지 않은 B의 모습을 잘 담아줄 거울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지난 봄 Y를 보고 내가 꽂힌 게 그 때문이에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 내용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수 있다. B가 좋은 거울을 찾아 일과 생활이 잘 어울리게 하기 바라는 마음은 "나는 바담 풍 해도~" 하는 훈장의 마음이다.

 

Posted by 문천
2017. 9. 18. 12:08

 

 

장세동 씨에게 배우시오

 

1976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는 상당한 접전이었다. 인권과 정의, 도덕성을 내세운 민주당의 카터 후보는 51% 득표율로 297인의 선거인단을 획득, 240인을 얻은 공화당의 포드 후보를 물리쳤다. 이 선거에서 카터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의 하나로 칠레의 군사독재자 피노체트가 꼽힌다.

선거 두 달 전 워싱턴 시 한복판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 희생자는 주미대사를 지낸 일이 있는 칠레의 망명인사 레텔리에와 한 미국인 동료였다. 칠레 군사정부의 소행이 분명한 이 테러는 피노체트를 감싸 온 공화당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9739월의 쿠데타 이후 몇 년 동안 13만 명을 투옥, 고문하고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인권탄압의 세계적 상징이 됐다. 모든 서방국가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비난하는 가운데 미국만은 그를 반공의 동지,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치켜세웠다. 그의 집권과정을 미국이 도왔다는 공공연한 비밀은 이제 미국의 비밀문건 해제로 밝혀지고 있다.

미국정부의 비호를 과신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9월만 되면 피를 봐야 하는 광증이 도졌던 것일까. 대통령궁을 탱크로 깔아뭉갠 것도 9월이었다. 이듬해 9월에는 피노체트의 전임 참모총장 부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동차 폭탄테러를 당했다. 다음해 9월에는 이탈리아에 망명 중인 칠레 정치인 부부가 총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이번에는 워싱턴에서 레텔리에가 자동차 폭탄테러의 표적이 됐다.

카터 정부는 이 사건을 파헤쳐 칠레 정보부장 콘트레라스의 개입을 밝혀냈다. 피노체트 퇴출의 길을 후에 열어줄 1980년 국민투표도 미국의 비호를 잃었기 때문에 국내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의 우방독재자에 대한 태도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콘트레라스는 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은 칠레 법정에서 받았지만 증거는 모두 미국에서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콘트레라스는 당시 정보부의 권력이 피노체트에게 있었고 정보부장인 자신은 그 하수인일 뿐이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보스가 물러나며 자기 앞만 가리고 졸개 사정은 나 몰라라 하니 졸개도 보스를 물고 늘어져 자기 책임을 줄이려는 판이다. 그 바람에 피노체트 체포를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던 미국에서까지 그 사법처리를 지지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깡패질을 하면서 의리마저 없다니 정말 한심하다. 쯧쯧. (1998)

 

 

이명박-원세훈 시절 국정원의 엽기적 행각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원세훈의 책임은 상당 수준까지 드러나고 있는데, 이명박의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 확인될까? 당시 대통령이 국정원장을 지휘하던 방식에 비추어 이명박의 직접 책임을 밝힐 증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의 운명은 원세훈의 입에 달려 있는 셈이다.

 

위 글에서는 칠레 독재자와 그 정보부장의 관계에 비겨 장세동의 의리를 찬양했지만, 사실 의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피노체트는 독재의 총체적 책임이 밝혀져 모든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 부하가 의리를 지키더라도 보상해 줄 능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전두환은 감옥에 가기는 했지만 그 옹호세력이 큰 영향력을 지키고 있었다. 장세동의 의리는 공리적 기준에서 합리성을 가진 것이었다.

 

원세훈은 과연 장세동의 길을 걸을 것인가, 콘트레라스의 길을 걸을 것인가? 내기를 한다면 그가 의리를 지킨다는 데 십원을 걸겠다. 의리가 강한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 아니다. 입을 다무는 편이 공리적 기준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뒤집어쓰고 설령 무기징역을 맞더라도, 보스만 지키고 있으면 몇 년 안 있어 풀려나리라고 그는 믿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