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의 성공은 일차적으로 미-소 두 나라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태도에 더 크게 달려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보다 미국의 정책이 더 적극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동유럽의 세력권 확보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처럼 공산혁명의 전망이 확실한 곳에서도 혁명을 지원하지 않고 있었다.

 

1946년 봄의 제1차 미소공위 좌초도 소련보다 미국에게 책임이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담 직후 남조선의 격렬한 반탁운동에는 미군정 측에서 유도한 것으로 볼 측면이 크다. 반탁세력 배제를 소련이 고집한 것은 미국의 의도에 소련이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도 이북 지역에 “우호적 세력”이 자리 잡는 데 만족하고 미소공위 속행을 쉽게 포기하기는 했지만, 문제를 만든 것은 미국 쪽이었다.

 

1년의 공백 끝에 재개하는 미소공위에 대해 미국은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을까.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련은 조선에 자기네에게 적대적인 국가가 들어서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북 지역에 자리 잡은 인민위원회-북로당 체제에 만족하고 있었다. 제2차 미소공위의 성공도 다른 무엇보다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1년 동안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더욱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 변화들이 있었다. 유엔이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방향으로 자리 잡아 왔기 때문에 연합국 협력체제인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에 미국이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소련과의 대결 자세를 선언한 트루먼독트린이 나왔고, 그 실행방법으로 마셜플랜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아시아 지역에 일본을 중심으로 소련에 대항하는 거점을 만드는 정책이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소련과의 대결 정책이 떠올리는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에 민심은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충분한 이유 없이 도발적 태도를 섣불리 취할 수 없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조그만 나라 조선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여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제2차 미소공위에 대해서는 미국도 원만한 진행을 위해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제1차 미소공위의 좌초는 미국의 여론이나 정부 정책보다 하지 사령관, 아놀드 수석대표 등 현지 인사들의 태도에 원인이 있었다. 하지 자신도 과오를 깨달았는지, 그 후로는 좌우합작을 지원하는 등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했고, 1946년 9월에는 수석대표도 브라운으로 교체되었다. 1947년 1월 취임한 마셜 국무장관이 미소공위 재개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소공위 재개 직후 몇 달 전 받았던 재미 조선인들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워싱턴 24일발 AP 합동] 당지 조선인 지도자 현동완 이하 39명은 거2월 마샬 국무장관에게 대하여 미군의 남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그 직위에 유임시켜 달라는 것을 서한으로 요청한 바 있었는데 공위가 재개되고 있는 이즈음 마샬 장관은 현씨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1) 조선의 통일과 독립을 획득하는 요망에 있어서 제조선지도자는 단결하고 있으며 또 달성을 위하여 진력하는 미군정에 대해서 조선인이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본관은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2) 서울에서 공위가 재개된만치 이는 조선을 위하여서는 중대시기라고 인정되며 공위업무가 성공하려면 각 조선인 지도자 제위의 최대한의 관용과 자제가 필요한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5월 25일)

 

6월 11일 미소공위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은 뒤에는 기자들 앞에서 만족의 뜻을 표했다.

 

[워싱턴 13일발 로이타 합동] 미 국무장관 마샬은 신문기자회견석상에서 방금 서울에서 개최중인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 진전에 대하여 만족의 뜻을 표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공위의 순조로운 진전의 결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合意에서 규정된 바와 같이 전조선에 걸친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다.

(2) 조선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미소공위는 민주주의적인 조선임정수립을 위하여 조선의 모든 지역의 민주주의적 정당 及 사회단체와 협의하는 데 관한 절차에 합의를 보았다 한다.

(3) 이러한 절차는 상당히 정밀하고 또 광범한 것인데 조선인에게 대하여 그들의 견해 및 건설적인 구상은 적당히 고려될 것을 확신시킨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6월 14일)

 

마셜은 미국의 역대 국무장관 중에서도 최고의 거물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육군참모총장 역할을 맡아 처칠에게 “승리의 조직자”란 찬사를 듣고 미 육군 최초의 5성 장군이 되었다. (맥아더를 흔히 ‘원수’라 부르지만 그는 미군이 아니라 필리핀군의 5성 장군이었다.) 미군 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휘관으로 물망에 올랐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신이 워싱턴에 있지 않으면 내가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어요.” 하는 바람에 아이젠하워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거물답게 소신도 강했다. 중국에 국공합작을 추진하는 특사로 갔을 때 장개석에게 미국의 지원을 끊겠다며 강하게 압박했고, 돌아와서 국무장관이 된 후 그 협박을 실행했다. 그래서 반공주의자들에게 중국 공산화의 책임자로 몰리기도 했다. 마셜플랜이 가동될 때 트루먼의 측근 중에는 정책 이름을 ‘트루먼플랜’으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트루먼 본인이 ‘마셜플랜’을 주장했다. 그가 국무장관으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독립했는데, 그는 승인을 반대했다. 이스라엘 승인 주장이 유대인의 표를 위한 책략이라며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이스라엘을) 승인한다면 나는 다음 선거에서 당신에게 반대표를 던질 거요.”

 

마셜의 국무장관 취임 전에는 국무부와 군부 사이에 경쟁 분위기가 있었다. 전쟁 때문에 군부가 엄청나게 커져 있는 반면 국무부는 미국의 새로운 위상에 걸맞는 역할을 위한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일본과 조선의 점령 업무를 국무부 아닌 육군부에서 맡은 것도 인력이 군부에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셜은 점령 업무를 국무부로 이관할 방침을 5월 초에 발표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10일) 그의 권위가 군부를 포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방침을 쉽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소공위 성공을 촉구하는 마셜의 입장은 확고했던 것 같다. 적어도 당시 관계자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이 분명하다. 재개 이야기가 나오고 곧 실현된 것은 소련 측에서도 마셜의 태도를 신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남의 미군정이 669명의 포고령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한 것도 마셜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법부장 김병로가 14일 발표한 바에 의하면 군정재판에서 90일 내지 5개년 징역의 판결을 받은 669명의 수감자들은 내주일에 석방될 것이며 나머지는 복역기간이 감형될 것이라고 한다. 금번 조치는 이전에 미군정재판소에서 심리한 재판을 조선인에게 이관함에 따라 임시특사조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인데 석방으로서 군정재판소에서 판결된 약 3분지1이 출감될 것이라 한다.

 

석방될 사람들의 주요한 죄명은 무허가집회 무허가시위 미군수품절도 미곡수집위반 수회 선동연설 등인데 이들 중에는 작년 10월 총파업관계자 허성택 박세영 등 전평간부 수 명을 비롯하여 먼저 24시간 파업관계자인 안기성 박문규 윤형식 등 민전 간부들이 있다. 이밖에 정판사사건 공판 때에 소요죄로 수감된 김사옥 구연상 이근호 조규영 등 그리고 영남소요사건 관계자도 그 대부분이 석방될 모양인데 사형언도를 받은 20여 명에 대한 감형 문제가 주목되고 있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6월 15일)

 

이 조치는 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6월 16일에 11명, 그리고 17일에 94명이 풀려났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6월 19일) 풀려난 사람들 중에는 연백, 개성, 장연, 양주 등 지방 소요사건 관계자들과 지난 3월의 ‘24시간 파업’ 관계자들이 있었다. 근민당과 사회민주당, 그리고 민전에서 6월 18일 이 조치에 대한 환영 성명을 냈다. 669명 외에도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이었지만, 모두 이 조치를 ‘좋은 시작’으로 반기는 입장이었다.

 

4월 11일자 일기에서 군정재판 이야기를 할 때 극단적 사례로 전라남도 검사장 여철현이 1946년 4월에 미군정 지사 프라이스 대령에 의해 ‘명령불복종죄’로 체포되어 1년 징역을 선고받은 이야기를 했다. 좌익 인사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결국 군정청 사법부에서 개입해 석방시키기는 했지만, 지방의 검찰 책임자가 미군 행정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잡아넣는 것이 미군정 재판의 실상이었다. 걸리지 않는 것이 없는 ‘이현령비현령’의 ‘포고령’ 위반으로 ‘엿 장사 마음대로’의 군정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미군의 조선인 억압을 위한 ‘사법무기’로 1년 반 동안 활용된 것이었다.

 

군정재판은 지난 4월부터 조선인에게 적용하지 않는 방침이 정해졌거니와, 이미 판결받은 죄수의 석방은 실질적인 재판 번복이었다. 이 번복은 군정청 사법행위의 부당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지난 가을의 좌우합작 과정 중 합작위에서 정치범 석방을 합작의 전제조건으로 줄곧 요구했는데도 미군정은 응하지 않았다. 이번 미소공위 재개에 임해 석방 조치를 서두르는 것을 보면 본국 정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