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월요일은 미소공위에서 협의단체 신청을 마감하는 날이었다. 반탁세력에서 이 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꾀한 데는 미소공위 진행에 타격을 주려는 구체적 목표가 있었다.
반탁진영의 모 청년단체 등 다수 군중은 23일 정오를 기하여 종로 네거리로부터 세종로를 돌아 공위회장인 대한문 앞에 집결하여 반탁시위를 하였는데 경찰에서는 긴급 동원하여 동 군중을 해산시키는 한편 MP는 덕수궁을 호위하는 등 삼엄한 경계였는데 12시40분경에는 일단 해산의 기색이 보이었으나 동1시부터 다시 각처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2시 현재 덕수궁 앞에는 수많은 군중이 집결되었을 때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외출하려던 공위 제2분과위원회 미측 대표 웨커링 준장은 군중시위에 대한 감상을 묻는 기자에게 엄연한 태도로 우리는 원칙을 변경할 수는 없다는 간단한 답변으로 차를 달려 나갔고 제3분과위원회 소련 측 대표 발라사노프 장군은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띠우며 태연한 듯이 정원을 지나갔다. 이와 같이 군중이 다시 집결하자 경찰은 계속하여 시내 중요가를 경비하였다. 이 반탁시위 군중은 대한문을 출발하여 남대문을 거쳐 남대문가를 빠져 동 4시경 종로 네거리에서 해산하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6월 24일)
지난 4월 보스턴마라톤대회를 제패한 선수단의 환영식이 이 날 있어서 반탁세력에서는 환영식 인파를 시위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나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 규모는 초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위의 효과를 크게 키워낸 것은 시위대보다 장택상의 경찰이었다. 경찰의 시위대 비호가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된 모양이다. 안재홍 민정장관도 경찰의 방관을 시인했다.
“불법시위 엄벌, 경찰 방관은 마찰 피하는 방침, 안 민정장관 담”
23일의 반탁 데모에 대해 민정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위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 행정명령 3호로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무 계출이 없이 시위를 하였다는 것은 위반행위로서 엄중 처단하겠다. 더욱이 외국 사절단에게 돌을 던졌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로서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 기자단으로부터 시위행렬에 경찰이 협조하였다고 일반은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자 장관은
“시위에 경찰이 협조하였다고는 보지 않으나 방관한 것은 사실이다. 흘러가는 물을 막으면 도리어 격류가 되는 것 같이 이를 제지하면 군중이 격동하리라고 보아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본다.”라고 대답했다. (<자유신문> 1947년 6월 25일)
시위 이튿날 장택상을 만났을 때도 기자들은 경찰의 야릇한 태도를 따졌다.
(문) 23일의 반탁데모는 허가가 있었는가?
(답) 없었다.
(문) 그러면 중지시키지 않는 이유는?
(답)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문) 집합한 반탁군중을 해산시키지 않은 이유는?
(답) 유혈극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문) 반탁대표 3명을 청장이 덕수궁으로 안내한 경위는?
(답) 대한문 앞에 모인 군중들이 미소공위 대표를 만나기 전에는 며칠이고 해산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이 뜻을 브라운 소장에게 전달하였던 바 만나도 좋다고 승낙하였으므로 안내한 것이다.
(문) 라우드스피커로 반탁 데모에 참가하도록 선전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데모에 참가하라고 한 것은 불법이다.
(문) 조선경찰이 해산 못시키고 미군까지 출동된 것은 조선경찰의 수치가 아닐까?
(답) 그것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을 것이다. 나는 미군만이 해산시켰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 현장에서 체포한 사람은 없었는가?
(답) 한 사람도 없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6월 25일)
시위를 중지시키지 않은 이유를 수도경찰청장이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해산시키지 않았다니, 유혈극의 위험만 있다면(또는 그런 위험을 자기가 감지한다면) 경찰은 어떤 불법행위도 방관하겠다는 것인가? 그에게 ‘직무유기’란 개념은 아예 없는 것인가? 경찰이 해산시켜야 할 시위를 미군이 해산시켜 놓은 다음에 “미군만이 해산시켰다고는 보지 않는다.”라니!
무엇보다 기막힌 것은 시위대 대표를 브라운 소장에게 데려가 만나게 한 것이다. 만나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여 만나게 해주다니, 장택상 자신이 시위대를 대표한 셈이다. 4월 4일자 일기에서 여운형의 테러범을 자칭하는 자를 끼고 장택상 휘하의 경찰과 동아일보가 여운형 욕보이기에 합작하는 꼴을 소개한 일이 있다.
수도경찰청장이란 자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노력은 않고 대표들을 만나라고 권하다니, 브라운 소장이 마지못해 승낙은 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욕했을까. 시위 이튿날 브라운이 발표한 성명에는 불쾌감이 잔뜩 묻어 있다. 조금 길지만, 브라운 대표의 입장과 관점을 폭넓게 보여주는 글이므로 몇 군데 밑줄을 그어 전문을 소개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예정대로 그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6월 23일은 조선 제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가 청원서를 제출함으로써 공위와의 구두협의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마감일이었었다. 그러나 일부 무책임한 분자들에 의하여 발생된 소동으로 인해 방해되었다. 세계 제 강국이 조선국민을 위하여 조선국민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진정으로 노력하고 있는 이 시기에 있어서 어떠한 소동의 발생은 외국에 대한 우호정신에 중대한 의문을 느끼게 한 것이다. 일부 청년층의 무질서한 행동은 그들의 진정서나 성명서 등에 그들이 조선의 최대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세력 획득을 기도하는 개인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조선 국가를 위하여 대단히 불행한 것이었다.
작일 서울시청 앞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수는 결코 많지는 않았다. 한국국민은 그들 자신이 이러한 당파적 행동으로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켜도 좋은가 아닌가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정오 덕수궁정문에서 시위운동을 개시한 우익청년들은 하오1시20분경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오후2시30분경에 본관은 이 군중 가운데서 지도자 3인이 본관과 상의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의 회담은 약 45분간 계속하였는데 그 3인의 대표자는 약 23세 가량의 청년으로서 매우 흥분된 표정으로 고성으로 오만한 태도로 말하였다. 이 청년은 4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1) 신탁을 즉시 철폐하라.
(2) 총선거 실시에 대한 보장을 할 것.
(3) 김구 씨에 의하여 수립될 독립정부를 조선의 정부로 인정할 것.
(4) 우리들은 이승만 김구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으며 폭력을 행사하거나 공위를 방해하라는 것은 아니다.
3인의 청년대표자 중 2명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씨의 지도를 대표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500여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이미 공위에 협력하고자 등록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청년들은 주장하기를 이 박사는 반탁통일운동에 있어 조선인을 지도하고 있는 바이며 또 만일 신탁이 기어이 실시된다면 죽음을 결행할 것이며 각 요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본관은 그들에게 신탁은 지금 즉시 철폐할 수 없으며 임시정부와 협의할 공동위원회는 조선에 대한 협조를 안출하게 될 것으로 실제에 있어 그때에라야 조선에 적용될 신탁의 정의를 한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후 결론에 이르러 청년대표자는 시위군중의 해산을 명령하겠다고 말하였다. 시위행동 중 공위의 소련위원에 대한 상당한 불경을 범하였던 것이다. 쉬티코프 장군은 본관에게 불만의 의(意)를 표하였는데 수 대의 소련자동차에게 흙과 돌을 던지었고 발라사노프 위원이 탄 자동차는 미병의 참가로 보호되었노라고 하였다. 본관은 동 장군에게 이 청년폭도들이 소련대표에게 불편을 주고 위협을 하고 방해를 한 데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본관은 서울 체재중인 소련대표의 신변보호에 대한 조치를 즉시 강구할 것을 동 장군에게 확언하였다.
당 시위운동에 참가한 청년들은 그들의 불법적 행동을 계속하는 일 방법으로 김구 씨가 서명한 미소공동위원회 보낸 진정서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였다. 결국에 있어서 본관은 조선국민에게 전 조선을 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현존하는 대부분의 애국적 정당과 협력하여 위대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를 계속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 23일 업무 방해를 기도한 소수의 무사려한 분자들과 반대로 공위와의 협의에 참가하려고 대다수의 단체가 청원한 것은 본관으로 하여금 조선국민 통일조선을 위하여 임시정부수립에 있어서 공위가 하루바삐 그 업무를 성공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6월 25일)
브라운이 보기에 시위 참가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은 경찰이 해산시키지 않고 자기에게 데려온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다. 장택상이 데려온 ‘대표’들이 자기와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고 고성과 오만한 태도로 자기네 주장만 일방적으로 내놓은 것이 불쾌하다는 것이다. 이 시위자들은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많은 조선인과 다른, 개인세력을 위해 움직이는 무사려한 분자라고 자기는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위에 대한 브라운의 강경한 비판에는 경찰의 야릇한 태도에 대한 비판도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튿날(6월 25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담화에는 경찰의 태도를 변명하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 이런 행동은 과반 발표된 행정명령 제3호에 저촉되므로 지방에서 거의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 주범인 등은 체포 혹은 체포 중에 있다. 그러나 서울은 반탁운동의 지역 중 주요(한 곳이므로) 그 운동의 규모가 방대할 것을 예측하여 경찰당국은 그 해산의 방법에 있어서 과도의 희생을 내지 않을 방책을 적용하여 시위에 참석하였던 군중은 무사하게 해산시키었다. (...)”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6월 26일)
변명에 나서기는 했지만 조병옥은 한 발 비켜선 입장이었다. 문제는 장택상이었다. 누구에게 점수를 단단히 따고 싶었는지, 정면에 나서서 너무 설쳤다. 희생을 피하기 위해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고 주장하지만 시위대는 온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시위대의 희생은 없었지만 미소공위 대표들은 피해를 입었다. 도저히 변명이 되지 않았다.
장택상의 입장에 대한 한 가지 진술이 6월 25일 김형민 서울시장의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당일 경찰에 대하여 군중을 해산시켜 달라고 청한 바 있었고 24일에도 경찰에 대하여 책임을 물었더니 장택상 씨 말이 러취 장관 이하 상부의 명령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있었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26일)
위에 인용한 장택상의 6월 24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시위를 중지시키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서울시장에게는 “러취 장관 이하 상부의 명령”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러치 군정장관 외의 “상부”라면 안재홍 민정장관과 조병옥 경무부장 뿐인데, 안재홍은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고 조병옥은 장택상이 맞먹으려 드는 상대였다. 요컨대 러치의 명령에 따랐다는 것이다.
과연 러치가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아니면 장택상이 그냥 둘러댄 것일 뿐이었을까? 러치와 장택상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불원간 한 차례 바짝 살펴봄으로써 때늦은 ‘진실게임’에 참고가 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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