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인민당(근민당)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5월 하순 중에 결성되었다. 앞서 사회노동당(사로당)은 좌익 합당의 주류를 자임하며 남로당에 맞서는 입장이었는데, 근민당은 해산한 사로당 사람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지만 남로당과 역할 분담을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 남로당’이 아니라 ‘비 남로당’ 노선을 취한 것이다.

 

근민당이 또 하나의 좌익 정당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민전 참여가 필요했다. 1946년 2월 출범 당시 민전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란 이름대로 좌익 중심의 폭넓은 통일전선이었다. 그런데 1946년 8월 이후 좌우합작에 반대하는 박헌영 일파의 노선이 민전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남로당과 사로당의 경쟁 과정에서 남로당의 외곽조직 수준으로 입지가 좁혀졌다. 박헌영 일파가 장악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전의 문호를 너무 좁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은 그 전에 조봉암의 편지에서 이미 나타난 일이 있었다.(1946년 5월 10일자 일기)

 

범 좌익 수준까지라도 외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전도 근민당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근민당도 민전에 참여해야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남로당은 장악력을 늦추려 하지 않았고, 사로당을 배척하던 식으로 근민당을 무시하려 했다. 민전은 6월 4일자 성명에서 남조선의 미소공위 협의인원 중 절반을 민전 산하단체에 배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6월 13일자 일기) 남로당의 욕심이 반영된 주장이다. 민전 장악력을 통해 자기네 일파의 발언권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민전 입장을 두둔해주고 있었지만, 이 주장에만은 동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 공위협의대상에 있어 민전 주장인 5대5를 여하히 보는가?

(답) 정부 구성할 때라면 논의될 수도 있으나 협의대상에 있어서 비율을 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별로 찬동할 것이 못된다.

 

(문) 귀당의 민전 가입 문제는?

(답) 아직 진척이 없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6월 10일, 11일)

 

이번 재개에 있어서 미-소간 합의는 제5호 공동성명의 선언서 서명을 통해 3상회담 결정 지지의 뜻을 밝힐 경우 과거의 반탁운동은 불문에 붙이고 협의대상으로 받아들이되 앞으로는 반탁운동을 포함한 3상회담 결정 반대운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로당과 민전은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에서 배제할 것도 전과 아무 다름없이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회담의 목적이 바람직한 건국 방략을 도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주장을 관철하고 자기네가 주도권을 쥐는 데 있었다. 그래서 회담장에 자기편 많이 들어가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남로당의 공식 주장은 철저한 미소공위 지지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넓은 범위를 끌어들여 좋은 방략을 끌어낸다는, 진정한 회담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일파가 유리한 위치로 나아가는 데 미소공위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지지세력은 미소공위가 자기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 아니므로 회담을 방해하려 들고 있었다. 정상적 정치 과정을 무시하는 극좌와 극우의 행태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회담의 진정한 성공을 바라고 있던 것은 중간파였다.

 

6월 11일 공동성명 제11호 발표 후 회담의 성공 전망이 가장 밝은 시점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자주 만나는 것이 기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 1947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근민당 부위원장 장건상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첫 질문이 여운형과 김규식이 자주 만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었고 그 대답은 개인적 교분으로 안다는 것이었다. 아래 기사가 나온 뒤로는 그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미소공위의 진전에 따라 중간파에서는 김-여 양씨를 중심으로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여 행동통일을 기하려 하고 있는데 기간 근로인민당 민중동맹 민주파한독당 사민당 청우당의 5당에서는 더 구체적인 보조를 같이 하려고 누차의 회합을 하던 바 19일 하오8시 시내 모처에서 5당 정식대표가 회합하여 의견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20일 오전 다시 5당대표가 회합하여 정식서명하고 다음과 같은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였다. (...)

 

一. 모스크바삼상결정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미·소·영·중 4개국 인민의 의사에 합치되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보장하는 국제공약이요 공위는 그 실천기관이다. (...)

 

一. 우리 5당은 반민주진영의 파렴치한 행동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들의 공위참가를 절대 반대하고 피등이 공위에 참가하는 것은 공위 5호성명에 위반되는 행동이므로 공위에 참가할 수 없고 공위에서 참가시킬 수도 없을 것임을 지적 성명한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21일)

 

코뮈니케의 제2항에서 ‘반민주진영’이라 한 것은 어느 범위를 가리킨 말일까? 이것은 남로당과 민전이 배제를 주장하는 ‘반탁세력’보다는 좁은 범위를 가리킨 것 같다. 위에 말한 장건상의 6월 17일 인터뷰에서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의 공위참가를 어떻게 보는가?” 질문에 대해 장건상은 “성공을 위하여 참가한다면 기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지지자들은 미소공위 방해의 목적이 분명한 반탁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5당 코뮈니케는 이 극단적 반탁세력을 ‘반민주진영’으로 지목한 것 같다.

 

6월 16일 새벽 7-8명의 괴한이 김규식의 집에 침입하려다가 적발되어 도주한 일은 그에 대한 최초의 테러 시도로 해석되었는데, 미소공위 성공 전망 앞에서 그의 위상이 부각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전의 강연회에서 중간파에는 여운형 외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없지 않았냐고 하는 소설가 장정일의 물음에 대해 나는 김규식의 카리스마도 대단한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얘기했다. 다만 그는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데 때와 장소를 가린 것 같다. 일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대통이나 빨고 지내지만 한 번 나서면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극우세력이 우세한 입법의원에서도 그는 강한 지도력을 보여 왔고, 미소공위 재개에 임해서는 중간파 결집을 위한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시국대책협의회(시협)도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 결집이었고, 6월 18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도 확충되었다. 합작위는 지난해 10월에 발표한 ‘7원칙’을 고수하며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배경활동으로써 시협과 호응할 태세였다. 반탁세력에서는 합작위의 해체를 그 동안 주장해 왔고 합작위를 전국조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도 좌절된 바 있는데 이 시점에서 합작위의 확충 범위를 보면 중간파 결집이 활발하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주석: 김규식 여운형

 

종전위원: 안재홍 원세훈 최동오 김붕준 정이형 여운홍 박건웅 강순

 

신위원: 이극로(건민회) 김호(신진당) 엄우룡(한독당혁신파) 신숙(천도교보국당) 장자일(민중동맹) 장두환(근로인민당) 이선근(조선청년당) 유석현(민주통일당) 이경진(청우당) 박주병(한독당민주파) 오하영(기독교) 김성규(유교) 이시열(불교) 유기태(대한노총) 김시현(고려동지회) 강원룡(기청) 박은성(애국부녀동맹)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6월 19일)

 

5월말에는 67개 단체가 모여 미소공위대책제정당단체협의회(공협)이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이극로와 이용직을 부위원장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 1947년 5월 29일, <서울신문> 1947년 5월 30일) 좌익의 민전, 우익의 민통에 속하지 않고 있던 중간파 성향 단체들이 모인 것이다. 느슨한 연합체인 공협까지 이제 김규식을 내세운 세 개 단체가 미소공위에 임하게 되었다. 세 단체의 역할을 김규식은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6월 23일의 인터뷰 기사에서 살펴본다.

 

(문) 합위와 시국대책협의회와 공협의 각자의 의도와 성격의 차이는 여하?

(답) 합위는 7원칙에 의해서 가급적으로 좌우합작에 노력하여 남북통일을 도모하며 미소공위에 협조 혹은 우리 자력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한 연합체이며 그리고 목표인 고로 기타의 과업은 부대적임을 다시 언명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임정이 수립되면 합위의 사명은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혹 임정이 수립된 후에는 본 합위로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계속하여 협조에 노력할는지도 모르겠다.

시국대책협의회는 공위에 대하여 자문서 응답도 있고 기외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협의의 공작을 하기 위하여 좌우를 물론하고 그 이상과 행동이 가급적 통일되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아 우선 비공식 좌담회로 하였는데 임시적으로라도 공위에 대하여 또는 시국문제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여 공통이 할 방법으로 임시연합기구까지라도 발기하여 볼까하는 것인데 혹 구체적 결합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즉 명실상부한 비공식 좌담회뿐이다. 공협은 특히 직접으로 공위와 출면 협동하려는 것이고 시국대책회는 우리끼리의 대책을 강구하여 가지고 혹은 공위와 접흡(接洽)하는 것은 각 정당이나 단체나 연합체에 위임하게 되기가 쉽다고 본다.

 

(문) 합위 위원을 확충하였는데 좌우측 인물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답) 소위 극좌극우 방면에 대하여서도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의 의사와 가담을 환영한다는 표시까지 하였지만 이에 대한 반응이 도무지 없었다.

 

(문) 공협 대표로 공위협의대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답) 공협이 협의대상으로 인준될는지 모르나 초청된다면 발언대표로 참가하겠다.

 

(문) 중간노선을 좌측에서는 우라고 우측에서는 좌라고 규정하는 모양인데 견해 여하?

(답) 제가끔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니 말할 수 없으며 원시경(遠視鏡)으로 본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극우극좌에서 자기와 행동을 같이 아니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위의 구성체에 있어 우익은 우라고 보며 좌익은 좌라고 보며 중간은 역시 중간으로 본다.

 

(문) 일부 정계에서는 좌우 외에는 중간노선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답) 그것은 이론 문제이고 이론에 가서는 한정이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 1947년 6월 24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