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세력은 ‘반탁’의 깃발 아래 뭉치고 있었다. 중간파와 좌익은 모두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이남 좌익의 공식적 대표인 남로당은 미소공위 재개에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공산당 박헌영계는 1946년 8월 시작된 좌익 합당 움직임에서 남로당의 간판으로 주류를 장악했다. 인민당과 신민당의 반발뿐 아니라 공산당 내에서도 대회파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박헌영이 이끄는 당권파는 주도권을 고수했고, 북로당의 지지 덕분에 11월까지 사로당으로 모인 저항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당권파’란 이름에서 지금 통합진보당의 소위 당권파를 바로 떠올리게 된다. 지하운동에 익숙한 운동가들은 당직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전술을 폈다. 그리고는 당직의 운영권을 발판으로 독단적 노선을 추구했다. 불만이 한계에 이른 비당권파는 전당대회를 통한 노선의 재정립을 요구했기 때문에 ‘대회파’로 불리게 됐다.

 

북로당도 박헌영계의 독단적 노선에 불만이 많았지만 남로당을 확실히 세워주지 않으면 이남 좌익이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던 셈이다.

 

허헌을 앞세워 박헌영계가 장악한 남로당은 설립 과정에서부터 ‘전술’에 너무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전술의 목적이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에 있었기 때문에 당 외부에 대한 영향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남로당의 합법활동 통로인 민전의 성격도 이에 따라 편협해지게 되었다. 여운형은 정치활동 재개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1월 27일 담화문에서 반탁운동과 반동테러에 대한 비판에 이어 민전 강화를 주장했다.

 

“반동세력이 삼상결정 실천을 방해하고 독립을 지연시키는 반민족적 노선으로 대중을 오도하고 있는 차제에 전국의 민주주의자는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 현재의 민전은 좌익의 영역을 넘지 못하였으며 최근에는 공산주의자전선으로 전화한 감이 있으니 편협성을 흔연 해소하고 전민주통일전선화하기에 노력할 것이며 전국 민주주의자는 허심탄회로 집결하여 반민주적 분자들의 책동을 분쇄하고 독립의 급속 전취와 민주건국에 이바지해야 될 줄 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7년 1월 28일>

 

1947년 초 남로당이 처한 상황을 서중석은 이렇게 정리했다.

 

1946년 7월 하순 이후 강경투쟁 일변도의 극좌노선인 신전술을 채택하려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고, 미군정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협력도 거부하며, 9월 총파업을 일으키고 10월 민중봉기를 선동하여 지하에서 비합법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남로당은 대부분의 정치세력과 대립, 단절되어 있어 정치력을 발휘할 방안을 갖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남로당은 주로 대규모 군중집회와 3-22파업 등 ‘군중투쟁’에 의지하여 정치적으로는 더욱 고립되어갔다.

 

남로당은 민전 강화안도 새로운 통일전선안도 제시치 못하고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단독정부 수립운동이 확산되어감에 따라, ‘단정 절대 반대’의 구호와 함께 단정 반대운동을 폈으나, 단정을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려는 활동은 벌이지 않았다. 표면으로만 볼 때 남로당은 민족문제를 거의 전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의 성공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통일된 자주국가의 수립을 포함한 남로당이 부딪치고 있는 제 문제의 해결은 공동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처럼 주장되었고, 그것은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555쪽)

 

미소공위 재개의 전망이 확실해진 4월 중순, 재개가 임박한 5월 중순, 그리고 재개 직후인 5월 말 남로당의 성명과 담화에서 미소공위 성공에 ‘모든 것’을 건 입장이 확인된다.

 

“이번 몰로토프 외상의 서한과 지난번 마샬 국무장관의 삼상결정 준수 서한은 소미공위의 급속한 재개가 확실시되고 있음을 다시금 우리 민족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당은 조선의 민주독립을 원조할 연합국이 의사표시 자유의 원칙을 반 연합국적 반 삼상결정적인 군국주의 일본의 잔당들에게까지 지나치게 적용하여 모처럼 다시 열릴 공위의 사업이 방해되지 않도록 신중히 고려하며 따라서 삼상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 실천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광범위로 협의의 대상으로 참가시키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5일)

 

“속개되는 공위가 성공되어 통일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그 첫째 과업을 완수할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공위는 꼭 성공된다. 이번에는 꼭 우리의 통일정부가 수립된다. 이것이 첫째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러나 이 반면 삼상결정을 파괴하고 공위를 파괴하고 통일적 민주정부 대신에 반동적 남조선 단정을 수립하려는 극반동분자들의 악질적 책동과는 일층 가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이들의 음모를 전면적으로 말살하는 싸움을 전 인민은 공고한 단결로써 승리를 쟁취하여야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5월 17일)

 

간도 5-30사건(1930) 기념 남로당 담화문: “오늘 우리 조선에는 모스크바결정에 의한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민주독립을 위한 이 중대한 시기에 일치단결하여 한 줌도 못 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추종자들의 공위 파괴 음모를 철저히 분쇄하고 단연코 공위를 성공시켜 우리의 대망하는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자.” (<자유신문> 1947년 5월 31일)

 

남로당의 ‘정치력’ 퇴화에 대한 서중석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남로당은 재개된 미소공위를 자기네 노선의 성공을 위한 절대적 통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몇 차례의 공식 발표에는 선명성의 주장만 나타날 뿐,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미소공위 성공을 함께 바라는 중간파와 협력할 뜻도 보이지 않는다.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있는 꼴이다.

 

미소공위의 협의대상 선정에서 남조선 발언권의 절반을 민전 산하단체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6월 4일의 민전 성명서도 남로당의 자세에서 연장되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을 결정함은 우리 민족의 전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수립에 있어 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는 동시 공동위원회의 가장 곤란한 성격을 가진 문제이기 때문이다. (...) 시급하고도 절박한 문제는 정부수립에 있고 이것을 성공시키자면 우리 민족의 좌우 양익을 물론하고 호상 겸손한 태도로서 공동위원회 업무를 성심 협력하여야 함은 우리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에 우리 민전은 남조선민전 산하 정당 및 사회단체 대 남조선 기타 단체 중간을 포함한 전 좌익의 협의인원의 비례를 5대 5로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북조선의 협의인원을 결정하는 문제와는 아주 별개로서 다만 남조선만을 기준한 것이며 또한 남조선좌익에 있어 그 협의대상에서 친일파의 집단과 및 모리배 반 삼상결정의 집단을 제외하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6월 5일)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란다는 세력에서 이런 주장을 어떻게 꺼낼 수 있었을까? 이북 협의단체의 발언권이 북로당이 이끄는 북조선인민위원회-북조선민전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북의 민의 표현이 좌익으로 쏠려 있는 상황에서 이남의 민의를 좌우익이 절반씩 나눠서 대표하자는 것부터 비현실적인 주장인데다가, 과연 당시의 민전이 이남 좌익 전체를 대표하기나 하고 있었는가? 이것을 “호상 겸손한 태도”라 하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1946년 2월 민전 발족 때는 범 좌익뿐 아니라 중도 우익까지 참여했다. 우익이 극우파 중심으로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을 조직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그런데 1946년 후반의 좌익 합당 과정에서 남로당이 민전을 장악하면서 비 남로당 세력이 배제되어 남로당의 외곽조직으로 전락했다. 그런 민전이 외연을 다시 넓힐 생각은 하지 않고 모든 좌익을 스스로 대표하는 것처럼 나선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서는 그 성공을 바라는 세력의 공동전선 결성이 필요했다. 반탁세력의 원천 배제를 주장하기보다 그들도 협의대상으로 끌어들이고 공동전선의 힘으로 그들을 눌러야 했다.

 

미소공위의 실패를 바라는 이승만과 김구는 참여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실리에 밝은 한민당의 미소공위 참여를 가로막지 못하고 있었다. 반탁세력은 이해관계로 뭉친 집단이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데 따라 균열을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남로당과 민전의 반탁세력 원천 배제 주장은 그 균열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는 중간파와의 합작을 위한 노력도 없었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미소공위는 저절로 성공하게 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은 태도를 남로당과 민전은 취했다. 트루먼독트린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던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황당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그들이 내부 헤게모니에만 정신이 쏠려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1946년 가을 반대세력과의 투쟁에서 그들은 헤게모니에만 매달렸고, 북로당이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승리를 거뒀다. 이번에도 헤게모니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자파 입장을 고수하고만 있으면 누군가가 미소공위를 성공시켜 주고 그 성공의 열매를 자기네가 많이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번의 헤게모니 투쟁 대상은 북로당이었을 것이다. 미소공위에서 남로당-민전의 발언권을 크게 함으로써 통일민족국가 건설에서 자기네가 북로당에 앞서는 주도권을 쥐게 되기 바랐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