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재개에 임하는 반탁세력의 자세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반탁세력은 세 개의 중요한 갈래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민당, 한독당과 이승만 추종세력. 한독당은 이 무렵 미소공위 지지파가 ‘혁신파’란 이름으로 이탈하고 김구 추종세력만이 남아 있었다.

 

미군정은 반탁세력의 미소공위 참여를 원했다. 1년 전 제1차 미소공위 때도 이들을 끌어들이려는데 소련 측이 “3상회담 결정 반대세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결렬에 이른 것이었다. 이번 회담 재개를 위해 소련에게 받아낸 양보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반탁운동은 협의대상 결격 사유가 되지 않지만, 협의대상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는 반탁운동을 포함, 3상회담 결정에 반대하는 언행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양보가 한민당에게는 충분했다. 당장 협의대상으로 들어가서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은 실리(實利)였다. 일단 실리를 확보해 놓은 다음 미소공위가 자기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언제든지 박차고 나올 수 있으니 참여 쪽으로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김구 세력은 3상회담 결정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당당한 임시정부가 이미 존재하는데, 왜 새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미소공위를 통한 3상회담 결정의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면 중경에서 온 임시정부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한독당으로 모인 지지자들을 잃으면서까지 협의대상 참여에 반대했다.

 

이승만도 3상회담 결정의 실현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영향력을 모두 배척한 것과 달리 이승만은 미국의 영향력을 원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조선 전체에 확보될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었다. 미소공위의 실패를 바라면서 또한 미국의 지지를 원했기 때문에 그는 이중플레이로 나섰다.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5월 27일 AP기자에게 이렇게 밝혔다.

 

(1) 나는 조선 정치지도자가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하도록 권고하였다.

(2) 나는 공위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또 타지도자들이 그 협의에 참가하는 것을 역시 반대하지 않으나 자신은 여기에 참가하는데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탁통치라는 것이 무엇인가 확정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 민주주의 정의에 대한 미소양측의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신탁통치를 수락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조선정부수립을 위한 선거의 자유성과 공평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열강은 공동감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 완전독립 획득에 대한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5월 27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협의 참가를 권하지만 자신은 참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신탁통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탁통치’를 걸고넘어짐으로써 3상회담 결정 실현을 방해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고집함으로써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최근 4개월에 걸친 미국 체류 동안 공화당 극우파의 지지를 확보해 놨다.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일부 미국 언론도 있었다. 미군정 입장에서 그의 미소공위 보이콧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를 극도로 싫어하게 된 하지도 그의 참여를 설득하러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18일 브라운 수석대표가, 이튿날 하지가 이승만과 김구 등을 만난 것은 이 설득을 위해서였다. 6월 3일에는 하지가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만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5일)

 

6월 2일에는 이승만이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방금 미소공위에서 나를 참가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참가 여부는 나의 자유일 것이다. 미국사람들이 쿠바나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필리핀사람이 아니고 4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사람이다. 나는 미소공위에서 우리 의견에 맞지 않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보다는 총선거를 통하여 자율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총과 폭탄이 나의 육체는 꺾을 수 있겠으나 나의 정신과 주장은 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임정추진문제에 관하여 김구는 잘 양해하고 있으나 아직도 몇몇 사람은 양해하지 않는 것 같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6월 3일)

 

김구는 5월 23일에 이승만과 연명으로 미소공위를 상대로 한 성명서를 보냈다. 이승만이 주장해 온 ‘신탁통치’와 ‘민주주의’ 해명 요구였다. 김구는 미소공위의 파탄을 바라기 때문에 이 요구에 동조한 것인데, “양해하지 않는” 몇몇 사람이란 한민당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한민당 인사들이 5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했을 때 그는 참여 반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박사와 한민 간부 요담”

30일 상오 한민당 장덕수 씨 와 수 명은 돈암장으로 이 박사를 방문하고 요담하였다 한다.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 회담은 공위 참가 여부에 관한 것이며 이 박사는 강경히 참가 보류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과반 해명을 요구한 동 박사의 참가에 대한 2 조건에 관한 회한이 미 국무성으로부터 도착하였다고 하는데 동 내용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금명간 동 박사의 결정적 태도가 표명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1일)

 

‘신탁통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승만(및 김구)의 해명 요구를 하지는 국무부로 보냈다. 자기로서는 이승만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부의 회한이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승만은 그 내용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는 6월 6일에 발표한 김구와의 공동성명에서 “우리가 하지 중장을 통하여 미 국무성의 해석을 요구한 것은 아직도 정식회답이 없으니 추측적으로 유행하는 낭설을 신빙치 말기” 바란다고 했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6일) 회한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반탁진영의 6월 4일 회의에서도 협의단체 참가 여부가 확정되지 못한 채 공동보조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정 대책회를 조직, 우익진 참가 여부 결정”

반탁진영 59개 단체 대표 80여 명이 4일 오전11시 민통 회의실에 회합하여 임정 참가 여부를 토의한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동 회의에서는 “임정에 참가하여 반탁투쟁을 계속할 것이냐, 불연이면 임정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반탁을 관철시킬 것이냐” 목표는 동일하나 이의 실현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상반하여 격론한 끝에 마침내 참가파에서 10명(장덕수 씨 등) 불참가파에서 10명(명제세 씨 등)을 양파 대표로 선출하여 임정 수립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동 위원회로 하여금 참가 여부를 결정케 할 것을 채택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6일)

 

장덕수 전기의 저자는 한민당을 미소공위 참여로 이끈 장덕수의 역할을 이렇게 서술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 21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회되었다.

그러나 민족진영은 미소공위의 재개와 함께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미소공위 협의대상으로 참가할 것이냐 보이코트할 것이냐 하는 내부갈등이 고조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5월 22일 공동성명으로 불참의 뜻을 분명히 했다. 많은 우익정당 사회단체가 두 지도자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신탁통치반대라는 당초의 원칙에 따라 미소공위 보이코트를 주장하는 의견과 미국의 남한단독정부 수립 계획이 확정된 이상 미소공위 참가는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의견이 불참 진영의 이론적 근거였다.

난마처럼 얽혀서 표류하기만 하는 민족진영의 내부혼란을 예의 주시해온 설산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인촌과 상의했다. “공동위원회에 우리 당은 참가해야 합니다.” 설산의 이로정연한 설명을 듣고 인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산은 다시 백남훈, 허정, 김준연, 서상일, 홍성하, 함상훈 등 당내 중진과 간부들에게 설득공작을 폈다. 모두들 설산 이론에 납득이 갔다.

한민당 상무위원회가 열려 미소공위 참가 여부에 대한 당론을 결정하게 되었다. 설산이 당론 결정을 유도해 갔다.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았다. (...)

한민당의 미소공위 참가 결정은 민족진영 각계각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정면으로 한민당 결정을 비난하였으며 “반탁진영에서의 이탈”이라는 성토의 소리가 빗발치듯 들려 왔다. (<설산 장덕수>(이경남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380-382쪽)

 

장덕수가 죽은 지 34년 만에 나온 책이므로 정확성에 한계가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끝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모두 한민당 결정에 반대했다는 것은 장덕수의 역할을 과장하는 관점에서 나온 서술 같다. 김구가 한민당의 실리주의 노선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민당 못지않게 실리적인 이승만은 반탁세력 전략의 입체화를 반기는 입장이었다.

 

6월 11일 미소공위의 공동공보 제4호와 공동성명 제11호 발표로 회담 진전이 부쩍 가시화되었을 때도 이승만은 ‘신탁통치’와 ‘민주주의’의 의미 해명을 요구하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이에 군정청 조선인 간부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승만 박사는 공위참가문제에 있어서 의연 보류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조병옥 경무부장 김병로 사법부장 이철원 공보부장 등 군정청 요인들은 미군정당국과 이 박사의 중간에 개재하여 이박사의 공위참가를 권고하는 한편 미군당국으로 하여금 이박사가 공위에 참가할만한 조건을 제시하도록 종용하고 있다고 전한다. 즉 군정요인 제씨는 12일 하오에 하지 중장을 방문하고 요담한 바 있었는데 측문한 바에 의하면 동씨들은 하지 중장에게 이 박사 조건 제시에 대한 회답을 성명으로 발표하라고 말하였다 하며 13일 하오에는 이 박사를 방문하고 참가를 권고하였다고 하는데 그 귀추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14일)

 

하지는 반탁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경제 원조를 비롯한 ‘지원’을 뜻하는 것이라고 거듭거듭 주장한 바 있었다. 그리고 제1차 미소공위 때는 반탁세력 배제를 주장하는 소련 측에 맞서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승만은 이 두 가지의 확인을 요구한 것이니, 하지는 형편대로 했던 말 때문에 약점을 잡힌 셈이다.

 

6월 15일에는 브라운 수석대표가 이승만과 만나 참가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틀 후 하지에게 보낸 공개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이 굳건함을 알렸다.

 

어떤 이들은 이 해석을 요구한 데 대하여 나의 의사를 오해하고 공위를 파괴시키려 한다 하였으나 나의 실상 주의한 바는 한미 간의 양해와 합작할 토대를 얻기 위함이니 이 두 조건의 본의만 정식으로 충분한 설명이 있다면 우리의 만족한 양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합작이란 것은 공동적으로 양해나 조약이 있어서 피차 협동해야만 될 것이니 한편에서 주장하는 것으로만은 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자유와 노예 문제는 신탁이란 문구를 여하히 해석하느냐에 달려있으며 한국의 해방과 속박 여부는 어떠한 민주정권을 공위가 한국에 실시할 것인가에 달린 것입니다. 공위에서 토의할 일은 대부분이 두 조건에 기본해야 될 것이 사실인데 이 두 조건의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는 우리로서는 맹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하가 한국 각 지도자들을 권유해서 공위에 참가하기를 주장한 바 소위 신탁이란 것은 경제적 원조를 위한 것이요 다른 것은 아니며 민주독립정부를 세운 뒤에 신탁문제는 제출될 것이며 신탁을 반대하려면 미소협의에 참가해서 하는 것이 밖에서 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다 하며 동시에 귀하는 주장하기를 모스크바결정을 변경할 수 없는 ‘불변칙’이니 어떤 부분이나 혹 전체를 아무도 고치지 못한다 하고 이 모호한 실정을 명백히 알려고 하는 자는 공위를 파괴하는 자라고 지칭하니 나는 이에 대하여 과연 두서를 차리기 어렵습니다.

 

내가 귀하에게 한 번 더 설명코자 하는 것은 한국 민중이 지금 저의 정부를 자율적으로 수립하여 비록 아직은 북조선에 행정하기를 고집하지 않더라도 남북을 대표한 민주적 기관으로서 관계국과 평화적으로 교섭하여 남북통일을 달성하기로 결심한 것이니 이것이 귀하와 나 사이에 협동 진행할 수 있는 기본적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으로 합의되어 이 방법으로 같이 나가기를 협정하고 다른 문제로 이 토의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한다면 나는 귀하와 다시 합동 진행할 수 있을 것을 언명합니다.

 

지금 공위가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로 노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미 협의된 대로 총선거 계획을 계속 진행할 것이니 만일 공위에서 작정되는 것이 우리에게 충분한 결과를 준다면 우리의 계획을 변경하기에 무난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계획을 실행함으로써 한국 민중들에게 저의 일을 저의가 해(解)할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니 아무 것도 말고 남들이 해주는 것만 기다리고 앉아있으라고 하느니보다 나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17일)

 

제1차 미소공위에 하지를 비롯한 미국 측이 성의가 없을 때 일방적으로 내놓았던 주장을 그대로 복구시킬 것을 이승만은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 AP 특파원 로버츠에게 이승만이 한 이야기에는 그의 속셈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1) 현재 서울에서 진행 중인 미소공위는 조선에 정부를 수립할 것이나 이는 명확한 공산주의정부도 아니고 미국식 민주주의정부도 아닌 잡탕적 정부일 것이다.

 

(2) 현재 조선을 점령하고 있는 미소 양국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 자체의 방책으로 조선정부를 수립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3) 만약 이렇게 수립된 정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조선인이 2, 3년간에 실패한다면 그때에 비로소 열강이 등장하는 것이 선책일 것이다.

 

(4) 미국 또는 소련의 그 일방이 이니셔티브를 취할 때까지 조선으로부터 철퇴할 것을 주저하고 있는 사실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5) 남조선에 있어서의 미측의 중립적 불간섭정책은 공산주의세력을 유리케 하고 조선인 사이의 분리를 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18일)

 

(1)에서 그는 “잡탕적 정부”라는 표현으로 좌우합작의 길을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2)에서는 조선인의 자주성을 명분으로 연합국 협력의 길을 거부했다. (3)에서는 건국 후 열강의 재개입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졸속한 건국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5)에서는 미국의 적극적 간섭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미국 극우파 언론과의 회견이어서 그런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속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회견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