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로 27년간 활동한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중국이 유럽과 다른 면을 면밀히 관찰했다. 어떤 면에 대해 그는 매우 탄복하며 찬양했지만 또 어떤 면에 대해서는 심한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가장 강한 혐오감을 보인 면 중 하나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축첩까지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부살이로 종노릇까지 해 가며 자식을 가능한 한 많이 두려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이 호색적 기질을 가졌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자식이 너무 많아 먹여 살리기 힘들 때 남의 집 종으로 팔아 넘기는 행태를 리치는 개탄했다. 더욱 심한 것은 흉년 때 아기를 버리는 일이었다. 환생(還生)의 믿음 때문에 험한 종살이를 시키기보다 차라리 일찍 죽어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라고 리치는 추측했다.

 

동양과 서양 문화적 전통 사이의 많은 차이 중에도 가족의 관념에는 특히 큰 차이가 있었다. 자손 남겨 가문 잇는 일을 동양인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리치가 이해했다면 호색적 기질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터럭 하나까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를 감히 망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이라는 효도의 원리를 알았다면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서양전통에서 자라난 근대적 가치기준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부모 자식 간에도 합리적 관계를 추구하고, 자식을 부모의 사유물처럼 여기는 것은 ‘봉건적’이라고 비판한다. 중산층 부모는 노후에도 경제적 독립성을 지키고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심청이를 비롯한 효자-효녀들의 이야기에 감동한다. 그리고 자식들 잘되라고 빚을 내 고액과외를 시키는 부모가 부지기수다. 재벌들은 자식들에게 굳이 사업을 물려주려 한다. 근대적-합리적 가족관과 전통적-배타적 가족관 사이에서 우리 사회는 몸부림치고 있다.

 

절망적 상황에서 아들의 손가락을 잘라 목전의 곤경을 벗어나려 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분노보다 연민을 자아낸다. 자신의 아픔보다 아버지의 괴로움을 걱정하며 손을 맡긴 아들의 모습은 온통 무너져 내리는 윤리질서 속에 하나의 작은 빛을 던진다. 죄가 밉지,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