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목을 끈 독일 총선이 막을 내렸다.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전후해 16년간 독일을 이끌어 온 콜 총리가 역사적인 장기집권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도 관심거리였지만, 통일 후 첫 정치적 분수령이 될 정권교체가 이뤄지느냐 하는 것이 역시 이번 총선의 최대관심사였다.


이번 독일 총선이 한국인의 관심을 특별히 끈 점이 둘 있다. 하나는 우리 정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당명부제가 치열한 접전상황의 선거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이 캐스팅 보트를 가진 연정파트너 후보로 진지하게 거론된 것도 통일을 희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흥미로운 일이다.


선거과정에서 두 거물 지도자의 ‘큰 정치’ 자세가 돋보였다.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라퐁텐 사민당수는 자기 당 총리후보 자리를 빼앗아간 슈뢰더 지사의 승리를 위해 열성적인 백의종군으로 지지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콜 총리는 선거 결과 자기 당이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게 될 경우 자신은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고 미리 밝혔다.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패배의 경우는 가상조차 하려 들지 않는 한국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를 국가에 대한 공헌으로 생각하는 자세다.


80%에 육박하는 투표율은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는 선거제도와 대도(大道)를 걷는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애정이 결합된 결과다. 지역구 공약도 먹혀들지 않고 금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까닭은 유권자들이 개인이나 지역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좋은 정치를 위해 한 표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원래 독일은 유럽에서 유별나게 투표율이 높은 나라다. 이것을 두고 주변나라에서는 무슨 일에든 동원이 잘되는 국민성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 백여 년간의 온갖 정치적 곡절을 딛고 민주정치를 이루고자 애쓴 독일의 노력은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 교과서 하나를 만들어냈다.


근래의 여론조사를 보면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많은 국민들이 찬성하고 있다. 사표(死票)효과를 줄이고 정당의 대표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대선거구제 등 다른 방안도 있는데, 정당명부제는 현 집권당에만 유리하다는 논란이 있다. 역시 교과서는 공부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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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