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근대역사학 발전은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나라 학자들의 공헌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 발전이 종합되어 제도적 완성을 본 것은 19세기 독일이다. 실증적 연구방법은 거기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고 역사학은 대학에서 중요한 연구와 교수의 분야가 됐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에 유학한 여러 나라 역사학자들이 본국 역사학계의 주축이 됨으로써 독일은 세계 역사학의 본산이 됐다.


랑케의 “그것이 실제로 어떠하였던가”가 일세를 풍미한 것은 이런 배경 위에서였다. 역사학자로서 랑케의 명성이 절정에 올라 있던 19세기 후반, 그 추종자들은 엄밀한 과학적 연구방법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남김없이 풀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랑케류 역사학을 지향하며 이에 ‘실증주의’란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믿음의 극단적인 예다. 가치관을 벗어난 보편적 연구방법을 주장하는 학풍에 가치관을 전제로 하는 ‘주의’란 말을 붙인 것은 넌센스다.


과연 랑케의 역사학이 진정 가치관을 초월한 것이었는지도 문제가 있다. 그의 방대한 업적은 서술방법에서 일견 엄정한 중립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후세 학자들 중에는 랑케의 주관적 가치관이 연구주제의 설정에 작용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랑케는 신의 섭리와 민족국가의 중요성, 군주제의 타당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객관성’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제국시대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한 믿음이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랑케의 방법론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들었다. 우리 역사학계에는 그런 믿음이 없는데도 ‘실증주의’가 아직까지 지상명제로 통용되고 있다. 랑케의 추종자들이 랑케의 목적의식은 이해하려 하지 않고 랑케의 방법에만 안주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랑케 사학 연구자 피어하우스는 지적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길이 없다(學而不思則罔)”는 공자말씀과도 통하는 지적이다.


건국 50년을 맞고 보니 이 50년 대한민국사에는 아직도 역사연구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다. 학문의 자유가 취약하던 시절 양심적인 학자들이 권력의 작용에 노출되기 쉬운 주제를 기피해 온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노골적인 폭압정권이 사라진 지 10년이 넘었는데 연구업적의 뒷받침 없이 교과서를 서술하는 사정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나. ‘실증’의 방패 뒤에 더 이상 숨어있지 말고 역사를 열심히 생각하며 민족의 길을 찾아나가는 분위기가 일어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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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