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국에 시달리다보니 일반인도 경제용어를 많이 쓰게 되고, 그 중에는 번역이 마땅치 않은지 외래어를 쓰는 것도 적지 않다. 그런데 개중에는 뜻이 명확치 않은 채 통용되는 것도 있다. ‘워크아웃’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동안 어수선했지만, 그보다 먼저 떠돌기 시작한 ‘모럴 해저드’ 역시 아직까지 뜻이 아리송한 채로 쓰이고 있는 말이다. ‘도덕적 해이’라고 더러 번역하기도 하지만 번역전문가들은 고개를 꼰다.


‘Hazard’의 원 뜻은 ‘위험’ 자체보다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경제분야에서 이 말을 쓰는 것은 정상적 시장질서를 해칠 수 있는 ‘위협요소’란 뜻이다. ‘Moral hazard’라면 그 위협요소가 경제주체들의 윤리적-정신적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화재보험에 든 사람이 불조심을 덜 한다던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생산력 증강을 위한 노력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던가, 처벌받을 위험이 없을 때 공공기물이 쉽게 파손된다던가 하는 것이 모럴 해저드다. 사회 전체에게 손해가 되고 그 손해가 결국 개인에게도 돌아올 일이지만 개인에게는 주의나 노력을 기울일 구체적 동기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행위에는 모험이 따른다. 손실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경제주체는 최선의 주의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대마불사’, ‘은행불사’의 믿음이 있으면 충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고, 그 부주의와 나태가 수십 년간 쌓여 오늘의 경제난국을 가져왔다.


경제난국은 모럴 해저드가 쌓여 빚어낸 총체적 난국의 한 단면이 먼저 드러난 것뿐일지 모른다. ‘사고공화국’의 명성이 몇몇 사람의 잘못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재난사고를 겪을 때마다 가슴을 치게 만드는 ‘안전불감증’ 역시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모럴 해저드의 한 모습이다.


박세리가 맨발을 벗고 모험적인 샷으로 우승을 거머쥔 것은 명승부의 장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둘만이 펼치는 연장전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준우승은 보장된 상황이었다. 이 장면을 국난극복의 상징으로 내걸기에는 문제가 좀 있다.


잃을 것이 없던 출발점에서는 ‘하면 된다’는 정신이 우리를 버텨줬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도약의 기회가 아니라 실패하면 통째로 무너져버릴 위기에 서 있다. 과감한 작전보다 성실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한 장면이다. ‘모 아니면 도’의 통쾌한 카타르시스는 스포츠에서 그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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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