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인질이 외교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제(齊)나라 왕자가 초(楚)나라에 인질로 있으면 초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인질의 본뜻이다. 그러나 제나라 왕자는 초나라 조정에서 초나라 정책이 자기 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로비도 한다. 한편 초나라로서는 제나라 왕자가 나중에 귀국해 중요한 위치에 오르면 초나라에 유리한 정책을 펼 것을 기대하고 환대를 베푼다.


중요한 우호국일수록 비중이 큰 요인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적대국이나 약소국에는 별 볼일 없는 인물을 보내고, 그런 인질은 받는 나라에서도 대접이 시원찮았다.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손자 자초(子楚)를 조(趙)나라에 인질로 보냈는데, 자초는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조나라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가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으로 귀국해 왕이 된 뒤 두 나라 관계가 험악해진 것은 인질시절 불만이 많이 쌓여 있었던 까닭으로 풀이된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9년간 청(淸)나라 조정에서 인질로 지낸 데도 이같은 외교의 뜻이 있었다. 청나라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세자는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는 현실론으로 명(明)나라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는 명분론을 견제하려 하고 청나라에게도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양국간 우호관계를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 집권세력은 청나라와의 우호에 완고하게 반대했고, 1645년 귀국한 세자가 곧 의문의 죽음을 맞음으로써 그 외교노선은 실종되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서양문물을 많이 가져오는 등 시대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으나 이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2백여 년 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막바지에서 조선이 극심한 충격을 받게 되는 실마리를 여기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 집권세력의 세계관이 과거의 평온한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에 우리에게 외교라는 것이 있었던가. 미국이 작성해 주는 명단대로 우방국과 적성국을 구분하는 것이 고작이었지 않나 싶다. 모든 나라와 동시에 협력하며 또 동시에 경쟁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는 진정한 외교를 필요로 한다. 러시아와의 분쟁으로 국제망신을 당하는 과정에서 국민을 속이려 한 부도덕도 작은 문제가 아니지만, 반성한다고 하루아침에 고쳐질 수 없는 것은 미개한 외교기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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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