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신손(聖子神孫)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 산고수려 동(東)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 무궁화삼천리 화려강산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 충군(忠君)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 애국하는 열심의기(熱心義氣) 동해같이 깊어 ...”


애국가의 원형인 황실가(皇室歌, 일명 무궁화가)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나중에 애국가가 오랫동안 이용할 ‘올 랭 자인’ 곡에 역시 맞춰 불렀던 이 노래의 가사는 윤치호(1865-1945)가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신정변(1884) 때 망명했다가 갑오경장(1894) 후에 귀국한 윤치호가 외부 협판을 지내며 외국사절들에게 국가로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고, 학부 협판을 지내며 몇몇 학교에 보급시켰다는 것이다.


황실가의 기본 틀과 후렴을 이어받은 애국가 노랫말은 1907년경부터 나타났다. 제4절의 “충성을 다하여”가 “님군(임금)을 섬기며”로 돼 있던 것을 제하면 현행 노랫말과 철자법 차이 정도밖에 없는 것이었다. 제4절의 고쳐진 부분은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1878-1938)가 주동이 되어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애국가가 국가로 지정되자 지금까지 작자미상으로 전해져 온 노랫말의 저작권다툼이 튀어나왔다. 애국가의 노랫말을 붓글씨로 적고 “1907年 尹致昊 作”이라 서명한 ‘증거’를 윤치호의 유족이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철자법이 1907년 당시보다 너무 현대화된 것이었고 제4절이 1919년 이후 고쳐진 내용으로 돼 있어서 망신만 당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이 문제의 조사에 나섰다. 참여자의 대다수가 윤치호 작사설을 수긍하면서도 결론에 합의하지 못해 ‘작자미상’을 그대로 남기게 된 것은 ‘조작된 증거’의 역효과였다. 10년이 안된 문서가 확실하다는 감정의견이 나오자 1945년 윤 씨가 죽기 직전 가족의 부탁으로 쓴 것이라고 유족은 변명했다. 그러나 1945년에 쓰면서 ‘1907년’이라 서명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석연할 수 없었다.


조사과정에서 윤 씨의 기독교 입교시기 논쟁도 있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처럼 기독교사상에 입각한 가사를 윤 씨가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윤씨 말년의 친일행각을 들먹여 작사자 자격을 따지는 얘기도 있었다. 영예를 탐하는 후손들의 이런저런 각축을 보노라면 과연 애국가의 노랫말에 국가(國歌)의 자격이 있는지부터 재점검을 바라는 마음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