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익을 좇는 존재라는 사실은 경제학의 기본전제다.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동이 어우러져 경제현상을 빚어낸다는 것이다. 법인(法人)인 기업도 자연인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자연인 중에는 도덕적 판단에 따라 간혹 이익을 도외시할 수도 있지만 이익추구를 명시적 목적으로 조직된 기업이라면 더욱 일사불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기업이 열심히 이익을 추구하는데 몇몇 기업만이 다른 길로 간다면 그 기업들이 곧 도태될 것이니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모든 기업이 변칙적 전략에 빠져 있는 것은 국가경제 전체의 구조문제다. 이익극대화보다 규모극대화가 수십 년간 기업활동의 지상목표로 자리잡아 온 결과다. 아무 분야건 닥치는 대로 사업을 벌이다보니 전반적인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고 끌어댈 수 있는 대로 빚을 끌어 쓰다보니 재무구조가 허약하게 된 것이다.

문어발 현상은 과거 기업정책의 산물이다. 70년대 수출드라이브를 위해 종합상사를 지정할 때 수출실적 등 외형이 기준이었다. 비슷한 때 중화학공업을 진흥하면서도 대기업의 덩치 키워주는 것을 국제경쟁력 획득의 지름길로 삼았다. 관치금융의 운용에는 기업의 규모가 언제나 대출심사의 첫째 기준이었다.

국가의 통제가 강한 상황에서 기업에게는 정부의 눈에 드는 것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고속성장의 시대에는 어느 분야든 사업기회의 선점(先占)이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주어진 상황에서 대기업의 다각화전략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대만과 말레이시아 등 우리와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꼽혀 온 나라들은 우리처럼 국가의 경제통제가 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우리같이 화끈한 단기간의 고속성장도 없는 한편 72년, 80년 등 불황의 충격은 우리보다 덜했다. 그러나 30여 년간의 경제성장 누적수준은 놀랄 만큼 우리와 비슷하다. 같은 곳까지 오는 데 우리만 유독 험한 길을 골라 왔다는 느낌이 든다면 과거의 개발독재자들에게 배은망덕일까.

당면한 구조조정의 핵심은 정부 경제개입의 축소에 있다. 낮은 정책금리와 자의적 금융운용이 사라지면 기업의 합리적 선택은 사업축소로 옮겨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고통에 시달리고 국가는 기간산업까지 팔아 넘기게 됐으니, 현 정부가 과거로부터 넘겨받은 빚은 단순한 외채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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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