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1840-42)으로 문을 연 중국에 쏟아져 들어온 서양인들은 정복자였다. 정치-군사적 정복을 위해서는 관리와 군인들이 들어오고 경제적 정복을 위해서는 상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문화적 정복을 위해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다른 서양인집단에 비해 종교적 양심에 활동근거를 가졌기 때문에 중국을 적대하고 착취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이 야만을 벗어나 서양과 같은 문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서양의 과학기술과 제반 사상을 소개한 것이 그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덧붙여 학교, 출판사와 병원, 고아원 등을 짓고 중국의 문화적-사회적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이 독선적 문명관을 가지고 중국의 전통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취한 것도 사실이다. 중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간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양대인(洋大人)’으로 통했다. 관원(官員)의 존칭 ‘대인’에 빗댄 이 말은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옹호하려 관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던 풍조에서 나온 것이다. 출신국의 위세를 빌어 교회의 힘을 키우기에 급급한 선교사들의 행태는 일반 중국인의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일이 많다.


윤리관의 차이가 오해를 불러온 일도 많다. 1870년 20여 명의 서양인이 군중에게 맞아죽은 ‘톈진 학살’이 그런 예다. 사건의 발단은 선교사들의 자선사업에 있었다. 관원도 아닌 민간인이 고아들을 모아 키우고 행려병자를 수습한다는 것이 중국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장기 적출 등 사악한 동기를 상상하게 됐던 것이다.


모처럼 화기로운 중-미 정상회담에서까지 인권문제로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는 것을 보면 동서양간의 문화적 단층이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가진 중국을 배제하고는 앞으로 미국의 세계정책도 있을 수 없다는 현실론으로 국내의 반대를 무릅쓴 클린턴이지만, 인권문제의 원칙론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천안문사태가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외국의 간섭은 현대판 ‘양대인’이라고 대다수 중국인은 생각한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은 하되 개발도상국 대우를 받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국 형편을 인정하도록 그들은 요구한다. 서양식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그들은 아직도 정말 아시아적 가치체계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