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동에서 공덕동으로 내려가는 길옆에 ‘추억의 자서전’을 공모하는 마포구청의 현수막이 붙어있다. 관내 노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모아 그중 좋은 것은 상도 주고 책으로 꾸며낸다는 것이다.


현수막을 쳐다보며 생각만 해도 좋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대상이라니 손수 글을 적어낼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손자 손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나간 일을 글로 풀어내려면 가족 간의 단란한 분위기도 깊이를 더하는 가운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이다. 수십 명 노인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시상식도 하나의 화사한 이벤트가 될 것이다.


회갑연을 자서전 출판으로 대신하는 이들이 근년 늘어나고 있다. 국민보건의 수준이 향상된 결과 60세 나이의 뜻이 옛날과 달라진 결과다. 이승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손을 모두 모아 한 차례 푸짐한 잔치를 벌이던 옛날의 회갑연이 오늘날의 ‘60세 청년’들에겐 무색하게 됐으니 한 차례 인생의 회고로 이를 대신하는 것이다. 옛 전통의 좋은 뜻을 살리면서 현대의 상황에 맞추는 훌륭한 계승방법이다.


일반인의 자서전 출판을 북돋워주는 또 하나 요인은 민주정치의 발전이다. 비리와 독단을 원천적으로 품고 있던 독재체제 아래서는 시정의 서민들조차 과거에 겪은 일을 털어놓고 말하기 어려웠다. 별것 아닌 일, 꿀릴 데 없는 일을 가지고도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얼마든지 곡경을 치를 수 있다는 공포감이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십 년 전 제주의 한 지방신문이 시작한 4-3 증언채록사업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둬 왔다. 수십 년간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내던 한 맺힌 사연을 풀어내는 고령의 증언자들은 이제 저승에 가도 앞서 간 희생자들을 떳떳이 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마음의 주름을 편다. 그들 마음의 주름과 함께 펴지는 것은 우리 역사의 주름이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거울로 생각했다. 거울로 차림새를 살피듯 역사로써 자세를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현대사의 험한 굴곡 속에 우리는 거울 보는 일을 잊어버렸다. 행적을 밝히는 데 대한 공포심도 있고 험한 세상 험하게 살아온 자기 모습 되돌아보기도 민망했을 것이다. 마포의 노인 분들, 나아가 전국 노인 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을 회고하시기 바란다. 그래야 우리 사회도 좋은 거울을 가지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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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