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일당이 왕자들을 해치려 하기에 태종 측이 역습하여 정권을 잡았다는 ‘용의 눈물’ 줄거리는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편찬된 기록에 따른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아서는 정도전 등이 정말 정변을 일으키고 있었다면 군대도 평상시보다 더 동원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겠냐는 등 의문의 여지가 많다. 권력을 쥔 자가 제거된 정적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냄새를 지울 수 없다.


태종 측의 가장 뚜렷한 증언자는 이무(李茂)였다. 그는 태종에게 정도전의 ‘반란 모의’를 알린 공으로 정변 성공 후 2등 공신에 책훈되었지만 그 2년 후 정도전 일파와의 친분 때문에 유배당하는 것을 보면 정도전의 최측근으로 있다가 전향했기 때문에 태종에게 이용가치가 큰 인물이었던 것 같다. 유배에서 볼과 두 달 후에 풀려났고, 직후에 벌어진 ‘방간(芳幹)의 난’에서 다시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된 데서 태종과의 깊은 유착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9년 후 민무질(閔無疾) 형제 옥사에 관련돼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한(漢)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우던 중 가장 곤경에 빠진 것은 팽성(彭城)싸움 때였다.


필마단기로 쫓기던 고조는 다급한 나머지 적장 정공(丁公)에게 통사정을 했다. 우리 사이에 원수진 일도 없는데 인정을 좀 둬달라는 고조의 말에 정공은 공격을 누그러뜨렸고, 덕분에 고조는 목숨을 건졌다.


몇 년 후 고조가 항우를 격파해 천하를 차지한 뒤 정공이 고조 앞에 나섰다. 팽성의 은혜를 생각해서 고조가 정공을 우대할 것이라고 모두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조는 벌떡 일어나 저 자를 당장 끌어내 목을 치라고 꾸짖었다. 정공은 자기 임금 항우에게 불충하였으니 후세 인신(人臣)은 그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조는 냉혹한 임금으로 전해진다. 한신(韓信) 등 제후에 봉했던 공신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군웅할거의 천하를 정리하고 새로운 제국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이런 냉혹함이 필요했던 것이라 한다. 공신과 외척에 대한 태종의 냉혹한 조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영삼 씨와 임창렬 씨의 엇갈리는 증언을 보며 한 때의 대통령과 부총리가 서로를 거짓말장이로 모는 모습도 민망스럽지만, 임씨를 굳이 편드는 여권의 시국관이 더 궁금하다. 이 난국이 상대방만 제압하면 돌파되는 것인가, 아니면 새 질서를 필요로 하는 시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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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