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초부터 영국 식민지로 있던 싱가폴이 1959년 자치정부를 세울 때 리콴유(李光曜)의 국민행동당은 의회 51석 중 43석을 석권했다. 그러나 리콴유는 바로 행정부를 구성할 것을 거부하고 3년 전 구속된 국민행동당 좌파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그들이 석방된 뒤에야 행정부를 구성했다. 좌파는 그 전에도 후에도 리콴유에 대한 최대의 반대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좌파를 적극 포용함으로써 리콴유는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싱가폴은 1963년 말레이연방에 자진 가입했다. 도시국가 싱가폴의 정치적-경제적 독립 유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리콴유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4분의 3이 중국계인 싱가폴은 결국 연방에 융화되지 못하고 2년 후 쫓겨나듯 독립했다.


6백여 평방km의 면적에 독립당시 2백만의 인구를 가진 싱가폴은 부존자원은커녕 먹는 물조차 수입해야 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제국주의시대에 급성장한 항구도시로서 사회질서의 뿌리도 없었다. 핵무기시대를 맞아 군사적 요충지의 의미도 사라진 마당에 제국주의가 물러간 뒤 그 경제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장래가 불확실했다. 탐욕스러운 중국인이 득실거리고 공산주의가 만연한 이 위험한 도시가 말레이연방에게는 반가운 식구가 아니었다.


독립 후 싱가폴의 지상과제는 생존이었다. 그러나 리콴유의 지도 아래 싱가폴은 생존은커녕 세계를 놀라게 할 번영의 기초를 쌓았다. 이 기적적 성공은 싱가폴의 특이한 조건 가운데 유리한 것은 최대한 살려내고 불리한 것은 극력 억제하는 꾸준한 정책의 성과다.


중국인은 별로 깨끗치 못하다는 평판을 아직도 갖고 있다. 중국 안이든 밖이든 중국인 거주지역이라면 지저분할 것을 사람들은 예상한다. 그런데 싱가폴은 깨끗하다. 싱가폴을 깨끗이 만든 정책의 예로 ‘오줌경보기’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 방뇨하는 짓을 막기 위해 오줌경보기를 설치, 오줌냄새가 나면 경비실에서 경보를 받고 뛰어올 때까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국가경쟁력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정원(庭園)국가’를 만들어 온 정책의 꾸준한 기조는 현실주의다. 오줌경보기뿐 아니라 태형(笞刑)의 시행 등으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필요한 현실문제에 한눈팔지 않고 매달려 온 결과가 오늘의 번영이라면 배울 점이 없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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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