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명군(明君) 영조는 원천적인 정치문제를 하나 안고 있었다. 이복형인 경종의 살해음모와 관련된 것이었다. 경종은 숙종 년간 당쟁의 초점이었던 장희빈의 소생인 데다가 병이 많고 자식이 없어서 즉위 전부터 왕위계승에 논란이 많았다. 즉위 이듬해인 1721년 노론세력은 왕을 강박해 영조를 세제(世弟)로 세우고 대리청정토록 했으나 왕을 옹호하는 소론세력의 반격으로 노론정권이 축출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노론인사들과 영조의 측근들이 경조의 시해를 꾀했다는 고변으로 50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옥사가 있었다. 영조의 왕위계승권도 위험에 처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는 채로 2년 후 경종이 죽었기 때문에 영조가 즉위할 수 있었다.


경종의 죽음이 노론세력과 영조에게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종 측근에서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간에는 영조가 보낸 게장을 먹고 경종의 병이 심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영조 즉위 4년 후 소론세력이 중심이 되어 경종의 상여를 앞세우고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에 전국의 각계각층이 유례없이 폭넓은 호응을 보인 사실은 영조의 즉위에 대한 민간의 의혹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이 의혹은 수십 년 후 사도세자의 죽음(1762)에도 배경이 된다. 경종 때의 역적과 충신을 영조가 뒤바꿔놓은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세자가 가진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세자의 탄핵에 앞장선 것은 40년 전 영조와 운명을 함께 하던 노론세력이었으며, 이로써 영조 즉위시의 문제가 그 손자 정조에까지 이어진다. 영조의 처분이 옳다면 사도세자는 죄인이니, 그 아들 정조 역시 떳떳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조 8년(1784) 노론계의 김하재(金夏材)가 바로 이 문제를 들고 나와 정계를 격동시키려 한 일이 있다. 이 때 정조는 대역죄의 물증이 되는 문서를 받아들자 바로 입에 넣고 씹어 삼켜 버렸다. 그로써 문제를 김하재 개인에게 국한시키고 정계의 한 차례 태풍을 피한 것이다.


정조 주변에는 사도세자의 신원(伸寃) 주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의 한(恨)을 정치문제화 할 것을 거부하고 개인의 지극한 효도로만 풀려 했다. 복수극의 끝없는 되풀이를 막겠다는 의지였다. 과거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배우기가 요새사람들에게는 왜 이리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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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