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귀양’이 ‘귀향(歸鄕)’, 즉 향리(鄕里)에 방축(放逐)한다는 뜻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고려시대의 형벌 ‘귀향’이 죄인을 자기 고향으로 보낸다는 뜻이 아니라 천민집단인 향(鄕)에 편입시키는 신분상의 처벌로 풀이하고 있다.


비슷한 오해를 받는 것이 조선시대의 금고(禁錮)다. 뇌물이나 횡령의 죄를 저지른 관원에게 흔히 주어진 이 처분 역시 신분상의 처벌로, 관직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등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자만 보고 이것을 오늘날의 징역형과 비슷한 것으로 상상하기 쉽다.


사람을 가두는 감옥은 고대사회부터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감옥은 행형제도의 주변요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형, 추방, 매질 등 본격적 처벌의 집행과정에서 죄수의 임시보관장소로 쓰였지, 감옥에 머무르는 기간 자체를 처벌내용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감옥살이가 행형제도의 중심이 된 것은 산업사회와 근대국가의 발달에 따른 일이다. 사회의 변화가 전통적 향촌사회의 통제력을 벗어남에 따라 국가가 직접 통제할 범죄행위의 범위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것을 관리하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감옥제도가 새로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대형화한 근대의 감옥은 애초에 사회 속의 ‘비사회적’ 요소를 격리하는 ‘감금’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인권의식의 발달에 따라 ‘교화’ 쪽으로 비중이 옮겨온 것은 ‘형무소’의 이름을 ‘교도소’로 바꾼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행형제도가 아직도 인권의 차원에서보다 정권의 편의에 따라 운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이스라엘에서는 12년 동안 독방에 감금당해 면회조차 금지된 채 지내던 죄수 하나가 비로소 산책 등을 허용받는 ‘정상적’ 감옥생활로 접어들었다. 핵기술자였던 바누누는 지난 86년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영국 언론에 폭로했다가 간첩죄로 중형을 선고받고 혹독한 감옥살이를 해 온 것이다. 이 반핵주의자는 인류를 위한 간첩행위를 한 것일까.


로빈 섬에서 18년간 독방생활의 자취를 보여주며 생각할 시간이 많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하는 만델라에게 클린턴은 그의 독자외교노선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 18년 동안 미국의 외교노선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감옥에는 가지 마세요” 기자들에게 말한 전직 대통령은 생각할 시간을 너무 많이 가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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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