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5. 13:41

“바람이 소소하니 역수 물 찬데(風蕭蕭兮易水寒),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壯士一去兮不復還).” 중국문학사를 통해 가장 비장한 구절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이 대목은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의 부탁으로 진(秦) 시황(始皇)을 암살하러 떠날 때 지음(知音)의 벗 고점리(高漸離)와 작별하며 부른 노래다.


형가가 진나라 궁정에서 시황을 배알하는 척하다가 척살(刺殺)에 간발의 차로 실패한 뒤 시황은 형가의 주변 인물을 모두 죽였다. 다만 고점리만은 그 절세의 연주솜씨를 아껴 두 눈을 뽑고 살려뒀다. 고점리는 기회를 엿보다가 시황의 앞에서 연주할 때 악기 속에 넣어두었던 납덩어리를 꺼내 시황을 때려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었다.


형가는 원래 연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태자 단의 부탁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전광(田光)이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연나라 원로 명사인 전광은 저자바닥에서 놀고 뒹구는 유랑인 형가의 고매한 인격을 알아보고 망년지교(忘年之交)로써 후히 대접했다.


노골화하는 진나라의 정복사업 앞에서 연나라는 화친이냐, 적대냐,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은 화친을 통해 나라를 길게 보전할 수 없으며, 시황의 암살만이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광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전광은 노쇠함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는 전광을 배웅하며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전광은 태연히 웃으며 응락했지만 형가를 만나 태자의 뜻을 받들어주도록 부탁한 다음 이렇게 일렀다. “일을 행함에 상대로 하여금 의심케 한 것은 협객의 도리가 아니다. 태자를 만나거든 내가 이미 죽었으니 누설을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주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광의 죽음은 선비의 결벽증이 아니었다. 그는 태자의 뜻이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고, 손수 받들지 못하는 대신 자기 목숨을 던져 형가와 태자를 맺어준 것이다. 남은 두 사람이 숱한 갈등을 넘기고 결행에 이른 것은 전광의 살신성인(殺身成仁) 덕분이었다.


구속될 처지의 안기부 간부가 새 부장의 정치적 라이벌에게 기밀문건을 넘겨준 일을 놓고 여러 모로 한탄이 나온다. 권력기관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보다 정권과 사익(私益)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그것이 의구심만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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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