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4. 20:39

고려시대의 안렴사(安廉使)가 4품 이하 당하관(堂下官)이던 반면 조선시대의 관찰사(觀察使)는 2품 이상 당상관이 되었다. 호족세력이 강하던 고려에 비해 조선의 지방통제가 강화된 것을 보여준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李成桂)의 권력이 확립된 창왕(昌王) 원년(1388)에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바꾸면서 품계를 높여 임명한 사실은 중앙집권의 강화가 일찍부터 조선 건국의 지향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지방통제는 개국(1392) 후까지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변방의 동북면과 서북면은 군사직인 도순문사(都巡問使)의 지휘에 맡겨져 있었다. 나머지 여섯 개 도도 도백(道伯)의 칭호가 몇 번씩이나 고려의 안렴사로 돌아갔다가 되바꾸곤 했다. 1417년 동북면과 서북면을 함경도와 평안도로 바꾸면서 도관찰출척사 체제가 안정됨으로써 그 이듬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길 준비가 마무리된 셈이다. 도관찰출척사의 이름을 관찰사로 바꾼 것은 그 50년 후 세조 때의 일이다.


지난 94년 보물 1208호로 지정된 “춘추경좌씨전구해(春秋經左氏傳句解)”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간기(刊記)의 연호를 선덕(宣德)에서 선광(宣光)으로 고쳐 세종 때 나온 책을 고려 공민왕 때의 책으로 꾸민 것은 위조범치고 애교있는 수법이다. 그런데 보물의 감정을 어떻게 하기에 간행자 ‘도관찰출척사 조치(曺致)’의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 관직에 그 인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고증의 기본인데, 공민왕 때는 있지도 않은 관직이요, 있지도 않은 인물이다.


춘추좌전이 하필 조작의 대상이 된 것도 공교로운 일이다. ‘기록하되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자세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업적이 춘추다. 노(魯)나라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며 공자는 사실만을 기록하되 표현의 미묘한 선택으로 도덕적 포폄을 행했다. 그래서 ‘춘추의 필법(筆法)’이라 하고 ‘작은 말에 큰 뜻(微言大義)’이라 한다. 글짜 하나 바꿔서 보물이 됐으니 이것이 ‘미언대의’일까.


공직자, 특히 전문분야 공직자의 무책임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지금의 경제위기에서 절실히 깨닫고 있다. 전문성이 급속하게 심화되는 사회적 변화에 기존의 법체계와 도덕률이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문화재를 조작하는 사기범과 무책임한 감정인 가운데 어느 쪽 잘못을 더 크다고 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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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