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 타계한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문호(文豪)의 이름에 걸맞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街道를 간다”는 그의 문명관을 잘 보여주는 기행문 시리즈다. 41책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 중에 한국을 다룬 것으로 “한나라 기행”(1972)과 “탐라 기행”(1986)이 있다.


1971년 취재여행을 준비할 때 젊은 한국인 여행사 여직원이 시바 씨에게 한국을 어떻게 보려 하는가 물었다.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문화적 뿌리는 통념보다 훨씬 깊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한국문화의 기층 속에서 확인하고 싶다고 시바 씨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합병하자는 뜻인가요?”


“한국과 일본 문화의 뿌리는 하나”라고 보는 일개 지식인의 순수한 견해가 정치적 의미로 오해받는 데서 시바 씨는 한국인의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보고 충격을 느꼈다. 그의 문화관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로, 이웃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척이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악용됐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기억은 가까워야 할 이 사이를 아직도 완강하게 떼어놓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한탄이다.


착잡한 생각을 누르며 시바 씨는 짖궂은 농담으로 어색한 입장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렇게 골치 아픈 민족이랑 두 번씩 합병하고 싶어하는 일본인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말에 상대방이 무척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시바 씨는 다시 놀랐다. 만만치 않다는 뜻의 말을 그렇게 좋아할 만큼 자존심에 집착하는 분위기를 그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 나라 문화를 연결해 보려는 시바 씨의 입장은 사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제국주의정책과 같은 틀이다. 다만 그는 연결의 중심축을 일본에 고정시키려 했던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자는 것을 강조한다. 정치적인 강압만 제거한다면 일선동조론에도 음미할만한 뜻이 많이 있으며, 이를 통해 두 나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시바 씨는 두 책을 통해 일본 독자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좋은 생각을 심어주려고 아낌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해박한 식견과 풍부한 정서가 그 노력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책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좋은 거울이 될 뿐 아니라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일본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한국 독자들이 더 요긴하게 읽는다면 저자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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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