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楊貴妃)는 중국에서 미인의 대표이자 사치와 퇴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옷을 짓기 위해 비단 짜는 사람과 재단하는 사람을 천여 명씩 궁중에 뒀다는 둥, 유모 수백 명에게서 짠 젖으로 목욕을 했다는 둥, 그녀의 전설은 황당하고도 화려하다. 아편을 내는 풀의 요염한 꽃을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 상징성의 압권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당(唐)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한 책임자로도 지목된다. 원래는 영명한 황제였던 현종(玄宗)을 미혹시키고 민간에까지 사치와 음일의 풍조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촉(蜀)땅으로 몽진(蒙塵)할 때 성난 군사들이 현종을 핍박해 양귀비를 죽이고야 어가(御駕)를 계속 모셨다고 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중국에서는 나라 하나 망쳐야 미인 축에 드는 전통이 있었다. 하(夏)나라 걸(桀)임금, 은(殷)나라 주(紂)임금이 말희(末姬)와 달기(妲己)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 하고, 뒤이어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동쪽으로 쫓겨간 것도 포사(褒姒) 때문이라 한다. 나라가 망했을 때는 무조건 요사스러운 여자를 이유로 갖다대는 것이 편리했던 모양이다.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현종 이래 당나라의 쇠퇴를 무력(武力)국가에서 재정(財政)국가로의 국가성격의 변화로 설명했다. 경제적 번영의 결과로 중세적 징병제인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집권력의 군사적 근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방의 군사세력인 절도사(節度使)의 발호가 당 후기를 주름잡은 사실로 보면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원인을 일개 여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오늘의 상식으로 보아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유교사회에서는 이런 설명이 그럴싸하게 통했다. 사실 큰 일이 있을 때 손쉬운 대상을 지목해 죄를 씌우는 일은 흔하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칸토(關東)대지진 때의 조센징이 그런 예다.


오늘날의 금융파탄사태를 놓고 일반국민의 소비풍조를 규탄하는 일이 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물론 그 동안 사치와 낭비가 지나친 감이 있고 웬만큼 억제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의 잘못이 분명한 일을 놓고 애매한 국민을 너무 탓하면 진정한 책임의 소재가 흐려질 염려가 있다. 난세(亂世)가 양귀비를 있게 한 것이지, 양귀비가 난세를 불러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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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