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세계정복에 프랑스사람들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해 온 까닭은 프랑스어가 세계어로 통하던 앞 시대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손을 든 것 같다.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과학잡지 “파스퇴르 의학보”는 1989년부터 영어로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 찍어서는 읽는 사람이 계속 줄기 때문이었다.


이베코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합작의 트럭제조회사다. 이 회사는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한 이탈리아인 중역에 의하면 “참가자들이 똑같이 불편하도록”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폴크스바겐의 상하이(上海) 공장에서도 영어를 쓴다. 중국어를 하는 독일인도, 독일어를 하는 중국인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를 생활어로 쓰는 사람은 전세계에 3~4억으로 집계된다. 13~14억이 쓰는 중국어에 비하면 단연 열세다. 그러나 중국어보다 영어가 세계어로 큰소리치는 것은 세계 어느 구석에서나 엘리트그룹 속에는 영어가 통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1대1 교섭보다 다자간 교섭의 비중이 늘어나는 세계화시대는 영어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편집자 로버트 버치필드는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며 2백년 후면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2세기 후반, 두 나라 말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될 때 그 사이의 통역에는 어떤 말이 쓰일까. 영국 영어도 아니고 미국 영어도 아닌 ‘국제영어’가 따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라고 한다.


국제영어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영어로 회담에 임하고 기자회견도 행하는 국제통화기금(IMF) 깡드쉬 총재만 하더라도 영어를 생활어로만 쓰는 원어민(原語民)과 대화하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의 원어민끼리도 의사소통이 어렵다. 원어민도 국제무대에서는 생활어 그대로 쓰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아까운 외화를 풀어가며 원어민 교사를 어린 학생들에게 붙여주는 것은 ‘세계화’를 ‘미국화’로 착각하는 짓이다. 꼬부라진 발음이나 비속한 관용어를 열심히 익히면 미국문화의 소비자는 될지언정 21세기 지구촌의 주도세력은 될 수 없다. 우리의 교육자들이 못 맡을 교육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시키겠다는 발상부터 다시 검토해 보자.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룡의 고민 (1997. 12. )  (0) 2012.01.01
양귀비의 누명  (2) 2011.12.31
거짓말에 관대한 사회  (0) 2011.12.30
잃어버린 현대사  (6) 2011.12.29
카리스마 없는 지도자  (0) 2011.12.2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