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마지막 해인 1994년을 맞이하는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의 마음은 한껏 자랑스러웠다. 1월부터 발효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OECD로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고 있었으니 멕시코가 대망의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살리나스의 이름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은 기정사실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장밋빛 꿈은 정월 초하루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새벽 두 시에 키아파스주(州) 무장봉기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예상외로 심각한 무장봉기사태로 고전하는 멕시코 체제에 더 큰 위협이 3월에 터졌다. 살리나스의 후계자로 지목된 대통령후보 콜로시오가 암살당한 것이다.


제도개혁당(PRI)은 1928년 창당 이래 6년 단임제의 대통령을 계속 배출하며 일당독재에 가까운 권력독점을 계속해 왔다. 전임 대통령이 다음 후보를 지명하는 식의 권력승계가 6십여 년간 멕시코 체제유지의 축이었다. 콜로시오는 살리나스와 마찬가지로 명문가 출신에 미국유학과 테크노크랫의 경험을 가진 인물로서 살리나스의 정책방향을 그대로 이어받을 전망이었다.


황급히 교체된 후보 에르네스토 세디요는 역시 미국유학과 테크노크랫의 코스를 밟았지만 빈한한 가정 출신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카리스마와는 담쌓은 인물로 경력도 떨어지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살리나스가 만만하게 주무를만한 후계자를 고른 것이라 생각하며 수렴청정을 예상했다.


세디요가 취임 후 뜻밖에 ‘과거와의 단절’을 꾀한 것이 멕시코에 닥친 ‘총체적 파국’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으리라고 사람들은 아직도 생각한다. 취임 후 한 달도 못돼 페소화 가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지는 금융공황이 터진 것이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동안 임기 말년의 살리나스가 자신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 대응책을 미룬 탓에 충격이 더 크게 되었다고 한다.


살리나스는 몇 달 후 망명길에 올랐다. 살리나스의 형이 정치적 암살사건에 연루된 것을 비롯해 재임중의 각종 비리가 불거져 나온 때문이었다. 1994년 멕시코의 위기는 수십 년간 PRI 독재체제가 쌓아온 부패구조에 근본원인이 있었다. 화려한 정치인이 아닌 세디요가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직한 지도자’로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 덕분이었다. 정치와 경제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는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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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