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비밀경찰 관계기록을 조사해 비밀경찰에 협력한 일이 있는 의원들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하고 불응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월 22일에는 끝끝내 사퇴를 거부한 의원 10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 첫머리에 경제위원장 루돌프 주칼의 이름이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래 대표적 저항지식인으로 시민포럼의 공천을 받아 의회에 진출했던 주칼의 혐의는 프라하대 교수로 있던 1961년 오스트리아에 체류할 때 같이 어울리던 미국인 학생들에 관한 정보를 비밀경찰에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주칼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협박 때문에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며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상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음을 밝혔다. 국내정치와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에 고백할 필요도 없는 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스스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로 소명을 마쳤다.


그러나 동료의원들도 선거구민들도 냉담했다. 사퇴가 유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여기고 버티던 주칼은 결국 다음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프라하의 봄을 잊지 못해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전향을 거부해 교수직에서 쫓겨난 뒤 20년간 막노동으로 살아오면서도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로 체제의 변화를 촉구해 온 한 양심적 지식인이 기다리던 새 체제 아래 매장당하고 만 것이다.


동구권 해체 후 드러난 비밀경찰의 행적을 보면 인간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든 온갖 추악한 공작이 다 있었다. 돈, 권력, 명예, 섹스, 이용되지 않은 미끼가 없다. 고삐 풀린 인간성 파괴 속에서 주칼의 ‘과오’는 ‘인간의 조건’을 결코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몰락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런 안타까움을 밟으며 동유럽의 민주화는 진행됐던 것이다.


고영복 씨 간첩협의 발표는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사회에서 그만큼 능동적으로 활동해 온 인물이 도대체 무슨 동기로 36년간 두 얼굴을 지켜왔다는 말인가. 남한에서 高 씨의 위치가 황장엽 씨가 북한에서 가졌던 위치보다 더 안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동기에 대한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高 씨가 체제의 갈등 속에 희생되더라도 그의 ‘과오’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체제가 ‘인간의 얼굴’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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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