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말 서귀포에서 열린 삼성화재배 세계바둑 결승 제1국은 이창호 9단의 낙승이었다. 그런데 대국 뒤 만찬장에서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9단이 보여준 ‘당당한 패자(敗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고바야시 9단이 이 9단 곁에 와 맥주를 한 잔 따라 권하고는 얼마동안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온화한 인품으로 잘 알려진 고바야시 9단이지만, 큰 승부의 상대방인 이 9단에게 친동생 대하듯 상냥한 태도가 아주 보기 좋았다.


그런데 고바야시 9단의 얘기 중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있었다. “이 9단과 조치훈 9단의 이틀걸이 바둑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한시간이 여덟 시간씩인 이틀걸이 바둑은 우리나라에는 없고, 일본에서 기성(棋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의 3대기전 도전기만 이 방식으로 둔다.


이 여덟 시간짜리 바둑 한 판 두는 것이 다섯 시간짜리 서너 판 두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고바야시 9단은 말한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이 대국 중간의 밤이란다. 봉수(封手)해 놓은 바둑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어 잠을 청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피를 토하며 바둑을 뒀다는 도쿠가와 시대 전설의 분위기가 이틀걸이 바둑에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대삼관(大三冠) 연패(連覇)가 증명하듯 이틀걸이 바둑으로 조 9단을 능가한 사람이 없다고 고바야시9단은 잘라 말한다. 다만 이 9단만이 그를 대적해 낼 가능성이 있으며, 두 절정고수의 전력(全力)대결을 보는 것이 바둑 두는 사람으로서 소원이라는 것이었다.


경험 면에서는 수십 년간 이틀걸이 바둑에 전념해 온 조 9단이 물론 유리하다. 그러나 이 9단의 진득한 기풍(棋風)과 불가사의한 괴력(怪力)이 이틀걸이 바둑에서 또 어떤 진면목을 드러낼지 기대도 간다. 약관의 나이에 천하무적의 경지에 오른 이 9단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새로운 도전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괴력의 이 9단과 투혼(鬪魂)의 조 9단은 이 시대의 절대강자들이다. 그러나 또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고바야시9단의 청정심(淸淨心)이다. 정상의 일각을 지키면서도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그와 같은 이들이 있기에 바둑의 길이 더욱 밝아져 절대강자의 모습도 잘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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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