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태종(太宗)과 위징(魏徵)의 관계는 동양에서 군신(君臣)간의 믿음을 나타내는 전설이 되었다. 위징은 언제나 대쪽같은 직언(直言)을 거침없이 올렸고, 태종은 그 직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밀히 살펴보면 과연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 믿고 좋아한 사이였는지 자못 의심쩍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너그러운 임금과 충직한 신하라는 역할을 각각 연기하는 연극 속에 서로를 상대역으로 필요로 하면서 긴장된 세월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긴장은 태종이 위징을 등용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원래 태자였던 형 건성(建成)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위징은 태자 건성을 보좌하며 태종을 억누르도록 꾸준히 건의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태종은 위징을 벌주는 대신 측근에 등용함으로써 포용력을 과시했다.


그로부터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직언으로 태종의 금도(襟度)를 계속 돋보이게 하는 것이 위징의 역할이자 존재가치가 되었다. 자기 뜻을 거스르는 직언을 태종은 늘 고맙게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위징에게는 계속되는 목숨의 고비였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태종이 위징에게 소원을 말해보라 하니 “신(臣)으로 하여금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도록 해 주소서” 하고 대답했다. 태종이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물으니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좌한 것이 양신이고 걸주(桀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 충신이라 답했다.


金대통령은 이회창(李會昌)씨를 정부가 위기에 몰렸을 때는 총리로, 당이 위기에 몰렸을 때는 대표로 발탁했다. 국민의 불신을 무마하는 데 李씨의 ‘대쪽’ 이미지를 이용한 셈이니 태종과 위징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결말은 다르게 풀려 가는 것 같다.


위징이 태종을 모신 지 18년만에 죽자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 위징이 반대해 온 태자의 폐위와 고구려 정벌, 두 가지 일을 바로 저질러 왕조를 위기로 몰고 갔다. 반면 李씨는 지금 金대통령으로부터 칼자루 넘겨받는 큰 고비를 넘기고 있다. 군신(君臣)의 의(義)가 분명해 고작 양신 되기나 바랄 수밖에 없었던 위징에 비해 李씨는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 모처럼 집권당 내의 순조로운 권력이동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도 흔쾌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