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오래된 대학들은 저마다 아끼는 잔디밭이 있다. 잔디밭 중에는 사람들이 일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고, 더러는 교수만 들어가게 하는 곳도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잔디밭을 교수들은 유유히 가로질러 가는데 학생들은 모퉁이로 돌아가야 한다. 중세적 특권의 유제(遺制) 같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영국에서 ‘평등’은 ‘동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국 대학의 이 풍속 얘기가 여러 나라 친구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나왔을 때 독일 친구 하나가 다른 방향으로 얘기를 옮겼다. 출입을 금하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써 붙이는 영국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왜 부러우냐 물으니 독일에서는 출입을 허락하는 잔디밭에만 “들어가도 됩니다” 팻말을 붙인다고 한다.


허가의 표시를 싫다 하고 금지의 표시를 부럽다고 하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정작 생각해보면 ‘표시’라는 것은 ‘실제’의 반대 면이다. 독일에는 아직도 권위주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어서 특별히 ‘허가’를 표시해 놓지 않은 것은 당연히 ‘금지’로 보는 분위기가 있으며, 그 반대인 영국이 이 친구는 부럽다는 것이었다.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습성은 참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주민등록제도만 해도 그렇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는 전국민의 의무적 주민등록제도가 자리잡지 못한다. 미국에서 신분증처럼 흔히 쓰는 사회보장카드는 소지자의 이름과 사인 외에 어떤 개인정보도 강요하지 않으며 개인의 권리를 위해서만 쓰인다. 국민을 권리의 주체보다 의무의 주체로 보는 비민주적 발상을 아직도 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주민등록제도다.


얼마 전 제주도의회는 도의 추경예산안 중 전자주민등록제 시범실시를 위한 비용의 전액 삭감을 의결했다. 지방자치제가 민주발전에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뜻깊은 의결이다. 주민등록제도의 비민주적 원리는 제도의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더욱 더 큰 폐단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정권은 집권초 유대인과 집시의 주민등록을 실시하며 효율적 관리와 보호를 약속했다. 몇 년 후 이 주민등록은 인류 최악의 범죄에 능률적으로 쓰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