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time Orientation / 바다를 향한 시선
청나라 지배자들은 바닷길로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흥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머나먼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학술이 우월하고 새로운 세력에 쉽게 응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그들은 지켰습니다.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였고 중국의 역사를 통해 바다 쪽에서 중대한 위협을 겪은 일이 없었습니다. 19세기 동안 중국 해안에서 거듭된 민족제국들에 대한 패배조차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해군력과 신기술을 습득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베이징의 조정이 왕조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것은 내부의 적이었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큰 세력인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하고 조정을 따로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윈난과 신장의 아득한 내륙에서 일어난 회교도 반란의 진압에 방대한 인력과 재력이 소모되었습니다. 서양 열강들이 해전 한 번 이길 때마다 장강을 따라 내륙으로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동안 이런 반란들도 일어난 것입니다. 경종이 크게 울린 것은 일본이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재빠른 대응으로 아시아에 처음 세운 자본주의 민족제국의 힘을 과시했을 때였습니다. 1894년 일본과의 해전에서 패하자 청나라 지배자들은 왕조를 지켜내기 위해 서양 학술을 익힐 것을 관리들에게 명했습니다.
서양세력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지 판단에 웨이위안(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가 나온 1843년 이후의 10년이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저작이 청나라 관계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일본에는 즉각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여기서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읽어내고 국가 개조에 한 세대의 총력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민족제국은 중국을 대하는 방식에서 서양 제국들을 본받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뜨게 되었습니다. 적대적인 해양세력의 존재, 그것도 가까운 곳의 존재가 중국의 생존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 일본이 보여주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너무 늦었던 것이 왕조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왕조가 무너지고 유교국가가 파괴된 후 그 뒤를 이은 공화국은 절실하게 필요한 해군을 건설할 재력도 여건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후 20세기 내내 대륙과 해양 사이의 불균형은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반세기 동안 중국 해안에서 해군력의 우위를 누렸습니다. 그 결과 군함 한 척도 없는 내륙의 인민해방군이 국민당 정권을 몰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민당이 바다 쪽에서 자유주의-자본주의 서양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949년 이후 냉전 속의 공산당 정부는 미국 해군력의 위협을 피해 많은 산업시설을 내륙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대륙 편향성은 더 심해졌고,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보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환으로 연해 지역이 경제성장의 엔진이 되었고, 이제 중국은 늘어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해군력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십년 전 “전환(pivot)”이란 말을 오바마 대통령이 쓴 것은 미국이 세계적 역할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의 힘을 운용하는 방법을 바꾼다는 뜻이었습니다. 중국은 여기에 도전할 뜻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전환”은 방대한 군사자원의 기동성으로 세계적 주도권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 말입니다. 중국이 겪고 있는 사고방식의 변화에는 “재균형”이란 말이 더 적절합니다. 전에 마주친 일이 없는 새로운 정치적, 이념적, 과학적, 경제적 힘 앞에서 자기네 역사적 유산을 몽땅 뒤집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이 자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데는 재균형이라는 말이 더 적절합니다.
Chinese Attitude To Empire And Nation / 제국과 민족에 대한 중국의 입장
이제 중국이 겪은 두 번째 불균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19세기 말 근대 민족제국의 일원이 될 때 겪은 일입니다. 1911년까지 청나라는 자기네 문명 유산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외부의 나라들이 중국과 관계를 맺을 때만 의미있는 존재로 보는 중국의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자기 위치를 인정하고 그에 맞춰 처신하는 나라들만 상대하면 되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다른 나라들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문명 중심부의 안전에 별 관계가 없는 나라들을 상대로 소중한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국 황제들은 국력을 키우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자기네 우월한 가치체계가 존중받고 보호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중국의 필요에 맞추는 이 세계관이 중국중심주의입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제국의 시대가 끝나자 중국은 새로 만들어진 유엔을 구성하는 신생국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국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유럽의 급속한 변화의 힘이 세계사의 진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이 자라났고, 근대 역사서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 많은 세계사 교재가 미국에서 나오면서 초점이 북대서양을 건너갔습니다. 그래도 유럽은 여전히 세계를 휩쓴 힘의 원천으로 인정되고, 그 힘은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됩니다.
청나라는 몇 개 제국으로부터 위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다를 통해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육지를 통해서는 러시아가 마치 중국이 하던 것처럼 서서히 밀고 들어와 청 황실의 발상지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 제국들은 모두 청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천하(天下) 개념이 경계가 없는 것이지만 천자(天子)를 칭하는 지배자들은 왕조의 행정 범위를 대략 정해놓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진나라 통일을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같은 틀로 이해해서 자기네가 아는 제국과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천자와 러시아 차르가 대등한 위치에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 1689년의 네르친스크조약에는 중국이 “천국(天國)”으로 표시되었습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공유하는 전통의 모습이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해양제국들은 서유럽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학혁명으로 산업자본주의의 발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에서 풀려나온 네덜란드와 미국 같은 국민국가들은 종교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의 주권을 부각시켰습니다. 그것이 유럽 근대국가의 모델이 되었고 지금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받는 정치적 기본단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국(帝國)”이라는 번역어에는 근대 제국들의 성격을 잘 나타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18-19세기에 일어난 제국 팽창의 배후에 있던 국민국가의 존재가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팽창의 힘이 새로운 종류의 제국주의를 만들어낸 자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국민국가의 시민들이 제국의 건설에 참여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시민의 민주적 권리가 국민국가를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가 진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인은 이 역사관에 마주쳤을 때 자기네 중국중심주의 역사관을 어떻게 지켜낼지 고심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대부분 사상가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관점을 지켰습니다. 중국과 서양 학술의 이러한 2분법이 이후 대부분 중국 담론을 지배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할 때 중국중심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이 없었습니다. 중국의 학술은 3천 년간 발전의 성과였습니다. 그 긴 기간 동안 중국은 그 존속에 대한 모든 위협을 이겨내면서 부근 세력들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강화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통합성과 저항력을 갖춘 국가체제는 위대한 문명을 지켜낼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 유산이 중국중심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인들은 그 핵심에 대한 도전이 예상보다 심각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새 세대 지도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에 입각한 도덕과 정치의 뿌리 깊은 원리들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중심 세계관은 지중해 지역 고대문화에 연원을 둔 다른 종류의 세계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월한 해군력을 가진 새 제국들이 대서양으로부터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나와 세계경제를 지배했습니다. 그때부터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쓰게 되었고, 그것이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입니다.
중국인이 볼 때 경제력과 군사력에 기초한 유럽중심주의는 자기네 문화적 중국중심주의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국중심주의는 한 지역에서 3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연속적 변화의 과정을 통해 빚어진 것입니다. 이 사상은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대신 외부의 새 사상들을 흡수하고 많은 정복자를 동화시키면서 강력한 문명으로 자라났습니다. 그 연속성에 몇 차례 매듭은 있었으나 19세기까지 이 과정이 계속되어 중국인은 중국 중심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독특한 문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중국인이 새로운 세계사의 관점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공헌이 인정받는 한 자리를 가지기 바랄 뿐입니다. 근대적 발전에 따르는 진보의 흐름에 중국인도 동참하기 바랍니다. 다만 자기네 전통 중 뛰어난 것들이 그 발전 속에 역할을 가지는 균형 잡힌 성장을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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